윤봉길 의사 기념관 방문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지난 번 상해 임시정부 유적 방문에 이어, 역사적인 현장을 찾기위해
방문한 곳은 바로 상해 루쉰 공원입니다. 루쉰 공원의 예전 이름은 홍코우 공원이며
이 곳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공원 안쪽에 있는 '매원'이라는 곳을 찾아갑니다.
윤봉길 의사의 호인 '매헌'과 정원이 합쳐진 뜻인 듯 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는
일제의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식과 일왕의 생일 축하식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청년 윤봉길은 이 곳에서 숨겨온 폭탄을 던집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였습니다.
윤봉길은 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으로
한학을 배우며 '매헌'이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윤봉길 의사 하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도시락 폭탄'입니다.
그러나 이점은 윤 의사에 관해 일반에 잘못 알려진 것으로,
홍커우 의거 때 윤 의사가 실제로 사용한 폭탄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라고 합니다. 물통 폭탄은 사고 당시 폭발해 버려서 정확한
모양을 아는 사람이 없으며 '도시락 폭탄'은 던지지 못한 채 잡히고 맙니다.
윤봉길 의사는 잡힌지 8개월 뒤인 12월 총살형이 집행되어 순국 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농촌 계몽 운동을 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일제시대의 농촌 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할 당시
남긴 글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입니다.
"사나이는 집을 나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그는 그렇게 남긴 말을 끝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임시정부와 달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안내를 해 주는 이도 없었고, 전시장소도 매우 작았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여가를 즐기는 공원의 모습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찾아 오는 이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뜻을 품었던 수많은 독립 운동 열사들의 피로 우리는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매헌이 나무에 묶인 채 죽어야 했던 나이 25세.
장부출가생불환.
이 두가지가 하루 종일 머릿 속을 맴돌던 날이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 나눠진 나라가 하나가 되는 것.
모두에게 자유와 화평이 주어지는 것.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던 자신을 발견해 부끄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매헌이 21세기의 이 땅에 살아있다면 외쳤을 말을 생각해 봅니다.
대한독립 만세! 통일 한국 만세!
이 기사는 2010/9/10, 정부부처 블로그 위젯 '정책공감'에 소개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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