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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만난 [1950년 폐허가 된 서울]

 

 

6.25 60주년 기념 특별전

1950..서울..폐허 속에서 일어서다 (Rise from the Ashes)

 

 

 

 

  

 한반도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ㆍ25 전쟁이 올해로 벌써 60주년을 맞이 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간 국민들이 재건한 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38선 인근에 위치한 서울은 60년 전 폭음과 포화 속에서 폐허가 되었지만, 지금은 세계 13위의 첨단 문화 도시로 구가하고 있다. 서울 역사 박물관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 6ㆍ25 60주년 특별전 ‘1950..서울..폐허 속에서 일어서다’(Rise from the Ashes)는 이렇듯 아픔을 딛고 일어선 서울의 모습을 6ㆍ25전쟁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다.

 

 

포화 속, 폐허의 서울

 

 1950 6 25일 새벽 폭풍전야와 같이 고요했던 서울은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서울 수복의 상징은 중앙청(구 조선 총독부 건물)이어서 중앙청에 꽂힌 국기에 따라 점령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뒤 불과 3일 만에 북한군은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하였고 그로써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남북의 치열한 공방으로 당시 서울 인구 170만명 가운데 2 8908명이 사망하고 3 6602명이 행방불명, 2 738명이 납치되는 등의 엄청난 인명피해가 양산되었고 111만여 명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혼란 속 서울의 모습을 전시장 입구에 축소 구성해 놓은 모형과 더불어 곳곳에 전시된 여러 유물과 사진들로 전쟁의 참상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 전시장 입구에 비치된 전쟁 당시 서울의 모형 >                          < 피난민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

 

  

6ㆍ25 전쟁을 보는 제 3의 시선

 

전시장의 한 공간에서는 여러 잡지에 보도된 6ㆍ25 전쟁의 기사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이곳에는 미국의 라이프(Life)’, 프랑스의 르 파트리오트 일뤼스트르(Le Patiriote Illustre)등 당시 주요 외신들이 보도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당시 6.25전쟁을 취재한 특파원은 약 600여명으로 항시 175-250여명이 일본 도쿄와 한국에 상주하여 취재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로선 엄청난 수의 특파원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에 미루어, 세계 모든 국가들이 6.25 전쟁의 심각성을 크게 인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장된 잡지들 중 한 이탈리아 잡지의 표지가 눈에 띄었다. 폐허가 된 자신의 집 앞에서 말을 잃고 허탈함에 눈물 짓는 어머니와 카메라를 무심히 바라보는 아이들이 함께 촬영된 사진이었다. 인물들은 모두 한 가족 같이 보이지만, 전쟁에 참전하였는지 아버지나 남자 형제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아직 고통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집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고 그 참상 앞에서 아직 걸음도 못 뗀 아이까지 업고 있는 어머니는 비통함을 숨길 수 없다. 여인의 두 눈에 비친 막막함, 두려움, 불안감이 너무나 생생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사진 한 장 이었다.     < 이탈리아 잡지의 표지 >

 

 

 

내가 겪은 6ㆍ25 전쟁

 

 직접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기에 이런 전시를 통해서 전쟁에 대한 많은 것을 느끼곤 하지만 아무래도 사진 등을 통해 접하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을 터, 해당 전시에서는 “내가 겪은 6ㆍ25 전쟁이라는 주제로 특별 영상실을 마련해놓았다. 해당 영상실은 전쟁을 겪은 다섯 명의 인터뷰를 들을 수 있는 곳인데 터치 스크린에 있는 전쟁 전중ㆍ후에 관련된 질문을 관람자가 선택하면 직접 인터뷰를 하듯이 전쟁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본 전시를 관람하시던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은 저는 전쟁을 겪은 세대여서 여기에 전시된 모습들을 직접 경험해 보았습니다. 전시된 것들을 보니 그 때 생각이 많이 나고 참으로 착잡한 심정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전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질문에서 장은영씨가 이야기한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이념을 바꾼 체육 선생님을 따라 어느 한 강당에 가서 북한 군을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하였다고 하였다. 연주 중에 인근에 폭탄이 떨어져 그 여파로 건물의 모든 유리가 깨졌고 그 파편에 상해를 입은 사람들이 신음하는 끔찍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 난다고 하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전쟁은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자리한 것이다.

 

 

 

                       < 영상실 내부의 모습 >                                 < 북한 군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한 장은영씨 >

 

 

 

  

  

   폐허 속에서 일어나다

 

 

1953년 휴전 이후, 이러한 극도의 혼란과 아픔 속에서도 국민 모두가 본격적인 재건에 힘썼다. 난민들을 위한 정책 사업이 실시되어 전쟁 고아나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보호 시설이 마련되었고 파손된 도로와 교량도 복구되었다. 새로운 생계형 직종들이 등장하여 경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만은 학교에 보낸다는 신념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려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전쟁 이후 근대화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전시장에 재현된 천막 학교> 

 

  

  6ㆍ25 60주년, 지금의 서울은 60년 전 전쟁의 참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몰라보게 성장 하였다. 현재 후대들이 전쟁의 아픔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관련 물품이 전시된 박물관이나 이러한 특별전에서만 가능할 정도이다. 하지만, 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의 마음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쉽게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전시를 관람하시며 참으로 착잡합니다”라고 말씀하신 할아버님, 영상 속의 인터뷰에서 끔찍한 기억에 아직도 어깨를 떠시는 장은영씨, 그리고 폐허가 된 자신의 집 앞에서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 여인까지, 전쟁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끔찍한 고통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쟁의 아픔에서 오는 교훈을 잊지 말고, 통일된 한국으로 나아가는 길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