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8기 김은아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전인 "남산의 힘" 전시에 갔다왔는데요. 이 전시는 항상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졌던 남산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각 색다르게 재조명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시회 전체의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분단과 남산'이라는 소주제 아래 전시된 그림과 문서 등 다양한 자료들은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 했습니다.
전시를 열게 된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친근한 중심성이 남산이라는 장소에 특별한 힘을 부여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대표한다."며 남산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하면서, "시대마다 지배세력은 남산의 경관과 공간, 이미지를 나름의 가치에 따라 다르게 빚고 사용해왔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그는 "장소를 읽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를 읽는 것이며, 장소를 가꾸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것과 직결된다."며 남산의 변화를 되돌아보고 오늘날 남산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겪는 시대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던 "남산의 힘"을 느끼러 함께 가보겠습니다!
1. 목멱, 한양의 안산
경국대전, 남산 엄격하게 보호
농계선생유고, 남산의 중요성
1392년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 후, 남산은 풍수지리와 유교이념에 따라 건설된 수도의 내사산(內四山)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을 구하는 국가의 수호 산으로서 기능했는데요. 그래서 초기에는 출입을 제한하고 벌채를 금지하는 등 엄격히 보호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계곡마다 흐르는 맑은 물과 도성과 한강이 굽어보이는 풍경, 사시사철 푸르른 남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흥취를 불러 일으켜, 훗날 친근한 앞산으로 변모해갔다고 합니다.
2. 식민통치의 현장
노기신사 수조
일본의 침략으로 남산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일본은 병합 전부터 남산을 거점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대경성'을 구축하려 하였는데요. 특히 남산 북쪽 기슭 예장동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통감부, 헌병대 등 식민지배의 핵심 통치기구들을 설치했고, 남서쪽 용산 일대에는 병영을 배치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회현 자락에는 일본 천황 등을 숭배하는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개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조건부 공원용지 해제
또한, 일제는 남산 주변의 거류지 확보 후 왜성대 공원, 한양공원, 장충단 공원 즉 남산의 북,서,동쪽에 '공원의 설치'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침탈했습니다. 왜성대 공원의 경우,일본 자국 거류민의 행락과 휴식을 위해 1897년 왜성대 일대 부지를 영구적으로 대여하여 공원을 조성한 경우입니다. 한편 장충단 공원의 경우, 고종이 충군의 제사 목적으로 설립한 장충단을 일본인 공원으로 개조하여 본래 장충단이 가진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남산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본의 전원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3. 분단과 남산
반공 이미지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남산 역시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조선신궁과 신사의 잔재도 철거되었으나, 곧 냉전으로 분단된 나라의 상징 공간이 되고 맙니다. 좌,우익 이념의 대립 무대가 되었고 월남민들의 거주지 '해방촌'이 형성되었는데요. 다시 말해, 남산은 통일된 나라의 상징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분단의 또 다른 상징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3.1절 기념행사 전단, 좌우익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까지 좌,우로 나뉘어 치열하게 전개된 이념투쟁 속에서 수도 서울의 공간도 좌,우익 세력들의 각축장이 된 것인데요. 실제로, 온 국민이 함께 경축해야 할 해방 후 첫 3.1절 기념식을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따로" 치렀다고 합니다. 심지어 1947년 3.1절에는 남대문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초대형 동상이 세워졌고, 동양 최대의 국회의사당 건설을 위한 부지조성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4. 민족중흥의 국민교육장
자유세계로부터의 힘
1960년 이후 압축성장의 분위기 속에서 남산은 근대화를 위한 국민교육장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반공교육장 자유센터가 산자락에 들어섰고, 산마루에는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동상들과 민족문화의 요람인 국립극장이 세워졌으며. 산 아래에는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반공을 국시로 삼고 지금까지의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하겠다.'고 공약한 군사 정부는 바로 그 다음해 남산의 공원용지 122,000㎡를 해제하고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거대한 반공연맹 자유센터를 건설하게 됩니다. 한양도성을 밟고 들어선 이 거대한 구조물은 2년 만인 1964년에 준공되어 반공교육의 요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경제발전 드라이브 속에서 외인아파트가 남산의 허리를 두르게 되었고 재벌기업들의 고급호텔들이 경관 좋은 곳마다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5. 돌아온 남산, 일상이 된 남산
남산제모습찾기 사업
1990년대 들어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한계와 남산의 자연환경 문제가 제기되면서 남산은 '자연', '사람', '역사'의 공간으로 돌아갈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남산제모습찾기 사업' 등을 통해 정부와 시민들은 함께 그 방향을 모색하며 남산을 훼손하는 시설들을 철거했고, 자연환경 보존, 시민 휴식공간 확보, 역사현장 복원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진통을 겪으며 남산은 시민 곁으로 다가왔고, 현재는 서울의 숨통을 트여주는 아름다운 남산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남산의 현재
정리하면, 남산이 시대에 따라 용도나 의미가 변모해온 만큼 상당히 많은 역사적 아픔을 겪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요. 최근에는 자연을 훼손하는 잠식시설 철거가 남산에 새겨진 역사를 지워버리게 된다는 문제제기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구 안기부 건물을 폭파 해체하거나 행정기관으로 전용한 사실은 시민단체의 반발을 낳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 결과 안기부 건물은 2006년 서울유스호스텔로 전환되었으며 최근에는 안기부터를 인권기념관 등 평화의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2005년 통감관저 터가 발견되면서 그 자리에 시민단체가 주도하여 경술국치의 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건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즉,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그 기억의 복원에 나선 멋진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산의 힘' 전시는 우리 옆에 있는 남산,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당시 지배 세력이 자신의 가치를 심으려 했던 남산, '분단'까지 견뎌냈던 우리의 남산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차례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이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11월 1일 일요일까지 무료로 볼 수 있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방문하셔서 우리가 겪어온 역사를 반추하며, 남산의 의미를 되새기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공감 하나가 통일부기자단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글 내용에 공감하셨다면, 공감을 꾸욱 눌러주세요♥
'통일 미래 길잡이 > 현장과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부장관과 청년위원장이 함께하는 <통일 공감 토크>! (0) | 2015.09.30 |
---|---|
'한반도의 장애명은 무엇일까?", 통일의병 서울북부 조한범 박사의 통일 이야기 (1) | 2015.09.28 |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북한 인권 사진전 현장을 가다! (0) | 2015.09.26 |
배기찬 박사의 '새 코리아' 이야기 (0) | 2015.09.25 |
'DMZ 통일열차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1) | 2015.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