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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6.25 발발 65년을 되새기며, 기사 1부의 전쟁기념관 방문 스케치

안녕하세요? 통일부 8기 대학생 기자단 하가연, 신수아입니다.  

지난 6월 21일, 기자단의 기사 1부는 전쟁기념관을 찾아 6.25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의미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쟁기념관에 가기 이전, 기사 1부는 먼저 북한의 대표적인 음식인 평양냉면을 먹기로 했습니다. 한국 유명 블로거들은 한국의 3대 평양냉면 맛집으로 을밀대, 우래옥, 그리고 을지면옥을 꼽는데요, 기사 1부는 이중에서 우래옥을 찾기로 했습니다. 

기자단의 다른 포스팅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냉면은 이북 지방에서 유래되어 오는 음식으로, 그중에도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 유명합니다. 이때 함흥냉면은 감자와 고구마의 녹말로 만들어지는 반면에, 평양냉면은 메밀로 만들어집니다. 메밀은 전분이 부족해 그 자체만으로는 면을 만들게 되면 퍽퍽하기 때문에 보통 밀가루 등과 배합해서 먹기도 합니다.


우래옥의 물냉면

기자단 중 평양냉면을 먹어봤던 학생은 두 명뿐이었습니다. 식당에는 20대의 대학생들보다는 어르신이나 가족 단위의 손님이 많았고 1층 대기실에 이북신문이 놓여있어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과 그 가족들이 주로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식기는 어땠을까요? 어느 미식가의 평처럼 '곱고 진한 육수, 품질 좋은 메밀면의 담백한 맛'을 즐긴 기자도 있었지만, 밍밍해서 맛을 아예 느끼지 못한 기자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남한의 냉면 육수에 비해 싱거워서 자극적이지 않은 맛을 즐기지 않은 기자도 있었습니다. 평양냉면을 서울이 아닌 냉면의 본고장 평양에서 먹기를 기원하며, 기자단은 다음 장소인 용산 전쟁기념관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분단의 기억을 가진 여러 공간 중에도 굳이 왜 전쟁기념관을 선택해 방문했는지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기자단은 모두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나 전쟁의 비극을 조부모님의 등 너머로 들으며 막연하게나마 인식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한국사 수업시간에 전쟁에 관한 교육을 받았지만, 전쟁의 발발 이유나 전개 과정, 그 폐해를 교과서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한국의 역사에 어떤 깊은 상흔을 남겼는지는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전쟁기념관을 찾아가 그 장소가 20대에게 주는 의미를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기로 했습니다.

전쟁기념관 1층은 선사시대부터의 역사를 망라한 전쟁 역사실, 2층에는 6․25전쟁의 과정을 전시한 6․25전쟁실 Ⅰ·Ⅱ관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을 위한 호국추모실이 있었으며, 3층은 6․25전쟁에서 유엔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제 맞춘 Ⅲ관과 기증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관 2층의 6․25전쟁실 Ⅰ·Ⅱ관은 역사의 국면을 스스로가 마주하는 것처럼 전쟁의 경과의 많은 부분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는 전시로 구성되었습니다. 전사자 유해발굴 상징존은 유해 발굴 현장에 있는 것처럼 재현되어 엄숙한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통계수치로만 제시된 전사자 숫자가 아니라 직접 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정전협정 체결현장이 재현된 공간은, 3년 2개월간의 전쟁이 마무리되는 순간을 잘 포착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전쟁기념관 1층 전쟁역사실, 2층 625 전쟁실(출처: 네이버)

기념관 3층 Ⅲ관에서는 6·25전쟁이 얼마나 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참가한 유엔군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이 나누어져 민족 간의 다툼이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한국전쟁기념재단 홈페이지에 따르면 ‘6·25전쟁은 한 지역에서 25개국이 참여했던 국제전쟁’입니다. 참전하기 전에는 이름을 알지도 못했던 국가에 파병되어 젊음과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존재를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옥외전시장은 전쟁기념관 홈페이지의 해설을 빌려 설명하자면 “6·25전쟁 당시 공산군과 유엔군의 주요무기들과 베트남 전쟁과 대 간첩작전 등에서 국가안보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무기들을 보면서 전쟁 당시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었을 지를 상상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산전쟁기념관 3층 유엔실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기자들


전쟁기념관에서는 일상에 묻혀서 잊고 있었던 사실, 바로 우리나라는 휴전국이며 전쟁을 경험한 나라라는 사실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바쳐 국가를 지키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박물관의 배치 역시 역사적 사료가 단순히 박제되어 관람자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청각 자료와 함께 능동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역사적 사건을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나라가 있기 위해서 수많은 고귀한 목숨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내게 가지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 뜻깊었습니다.

전쟁기념관 입구의 동상

그러나 대학생 기자단으로서 전쟁기념관에서 느낀 아쉬웠던 점은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쟁기념관이 단순히 전쟁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쟁의 아픔을 극복하고 앞으로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떤 가치가 필요할지를 함께 고민을 나눴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때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집단은 여성, 노인 그리고 어린이입니다. 집안의 가장이나 건장한 아들들은 군인으로 징용되고, 약한 가족들이 민간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집을 지키고, 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기에 쉽게 희생당합니다. 그만큼 전쟁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권리가 무자비하게 무시당하는 곳이며, 때문에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6·25 전쟁의 백여 만 명이 넘는 희생자 중 85%는 민간인이라고 합니다.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을 보더라도 전쟁의 수난을 온몸으로 수용하고 고통 받는 자들은 여성과 어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호국추모실, 전사자명비를 통해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의 용맹함과 애국심, 그리고 고귀한 희생을 추모했지만 희생된 민간인을 추모한 전시물은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통계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보도연맹 학살사건 당시의 사진(출처: 경향신문)


 6·25전쟁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비롯해 전쟁 때 전국 곳곳에서 이념을 근거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이 많았습니다. 양민학살은 북한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라, 국방군과 미군에 의해서도 시행되었습니다. 전쟁은 이념과 관련 없이 모두를 야만으로 만듭니다. 단순히 공산군의 야만성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6·25전쟁 시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제노사이드의 현장을 더 세밀하게 기록하고, 그때 희생된 민간인들의 넋을 기리는 공간을 마련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이 적과 아군이라는 극명한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것은 전쟁이 시사 하는 또 다른 비극입니다. 지금은 6·25전쟁이 일어난 냉전시대가 아닙니다. 냉전은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가시화되었으며 1989년 몰타 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중국은 시장경제화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격랑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는 아직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기에 반공사상은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나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 바친 분들을 추모하는 전쟁기념관의 전시는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습니다. 특정 체제가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할 수 있고 필요시 이를 전시를 통해서 홍보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념보다 사람이 더 중요한 탈냉전의 시대입니다.


1989년 12월 몰타 회담에서의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전쟁기념관이 6.25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관련된 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점은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과거 비극의 분단시대를 넘어 평화를 위해서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지를 더 이야기했으면 했습니다. 전쟁은 좋은 것이기에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기에 기념관을 만들어 기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의 참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취해지고 있는 정부 또는 민간의 평화사업을 좀 더 열거해 주고 전시해 줬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기념관 입구에서의 제 8기 대학생 기자단 기사 1부!


분명한 점은 북한은 군사적으로는 정적이지만, 통일 시대를 함께 이끌어갈 동반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참혹성을 강조하는 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이념을 떠난 공통의 상흔으로 기억되지 않는 전쟁은 북한을 통일 시대를 함께 열 동반자가 아닌, 적으로 기억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민족화해와 통일에 대한 서술, 휴전 이후에 남북긴장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쟁기념관에 녹아들어야 할 때입니다. 더불어 그 시작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는 36년 동안이었지만 광복된 지 70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일제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분단 70년의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해와 합의 그리고 대화가 필요할 입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국가의 외교와 국제정세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좋지만, 무엇보다 젊은 세대들이 앞장서 통일의 필요성을 공감해 통일에 관한 관심이 전 국민에게 확산되는 것이 통일 이후의 개인의 삶의 질에서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의 노력을 계속 지켜봐 주시길 부탁합니다. 이상으로 기사 1팀의 하가연, 신수아였습니다. 

(이 글은 민화협의 <민족화해>7월호 <통일 공간, 통일 공감 ① - 평양냉면과 전쟁기념관>에 실린 글을 쉽게 풀어 쓰고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사진 출처: 기자 본인, 경향신문, 네이버 지식백과,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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