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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이야기가 있는 감천문화마을 ①> 6.25전쟁 피난민들의 고향

  안녕하세요. 8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백상민입니다. 아름다운 파도와 갈매기, 그리고 넓은 바닷가로 유명한 부산에서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의 사진부 멤버들은 이틀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사진부 멤버들의 부산여행은 통일에 대한 의식을 함양하고, 사진부 멤버들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해 진행되었는데요. 특히 부산시 남포동에 위치한 감천문화마을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소였습니다.

  지중해의 해변마을을 연상시키는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은 다양한 색깔을 지닌 주택들이 밀집한 마을로 유명합니다. 다수의 여행객들에게 필수 여행코스로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현재 부산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답니다. 하지만 이 마을의 화려한 이면 속에 감춰진 역사적 아픔은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의 이야기는 대다수의 여행객들이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감천문화마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천동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들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 감천문화마을에 숨겨진 역사적 이야기를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6.25전쟁과 피난민, 그 속에서 생겨난 작은 마을


△ 감천문화마을의 1950년대 모습/백상민 기자△ 감천문화마을의 1950년대 모습/백상민 기자

△ 오랜 세월을 간직한 연탄창고/백상민 기자△ 오랜 세월을 간직한 연탄창고/백상민 기자

  감천문화마을의 집단촌은 1918년 태극도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도들이 마을 주변에 거주하면서 생겨났습니다. 태극도 신도들은 신앙을 목적으로 감천동과 아미동을 연결하는 교통로인 반달고개 주변에서 집단촌을 형성하게 됩니다. 현재 감천2동으로 불리는 마을은 이러한 집단촌이 번성하기 시작한 1958년에 이르러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감천문화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되었는데요, 1950625일부터 시작된 한국전쟁의 여파로 인해 다수의 피난민, 그 중에서 북한 주민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넘어온 남북한의 주민들은 감천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집단촌을 만들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당시의 피난민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감천동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한국전쟁의 여파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북한 주민들은 결국 감천동에서 집단촌을 유지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감천문화마을은 6.25전쟁과 피난민들의 아픈 역사로 인해 형성된 작은 감천동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② 민족상잔의 비극을 극복하고 새로운 명물로 탄생하다


△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감천문화마을의 모습/백상민 기자△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감천문화마을의 모습/백상민 기자

△ 감천문화마을의 골목 모습/백상민 기자△ 감천문화마을의 골목 모습/백상민 기자

△ 감천문화마을의 골목 모습/백상민 기자△ 감천문화마을의 골목 모습/백상민 기자

  감천문화마을은 한국전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 근현대사의 흔적과 기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장소별로 독특한 특징과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감천동의 산복도로와 옥녀봉인데요.

  먼저 산비탈을 허물어서 만든 계단식 구조의 감천동 마을에는 '산복도로'라는 장소가 위치하고 있는데요. 산복도로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감천동이라는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의해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파른 경지에도 불구하고 산복도로는 문화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천마산 인근에 위치한 옥녀봉은 산자락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독특한 계단식 집단촌으로 유명합니다. 산비탈을 허물고 그 자리에 주택을 짓는 방식으로 계단식의 마을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위에서 바라본 감천동의 모습은 여느 마을과 다를 것이 없지만 멀리서 바라본 감천동의 모습은 옥녀봉에서 천마산까지 이르는 높은 지대에 주택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감천문화마을의 독특한 명물이라고 생각합니다.



 ③ 부산의 명물로 자리 잡은 감천문화마을


△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감천동 골목길 모습/백상민 기자△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감천동 골목길 모습/백상민 기자

△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예술작품들/백상민 기자△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예술작품들/백상민 기자

△ 감천동에서 찾은 서울과 평양/백상민 기자△ 감천동에서 찾은 서울과 평양/백상민 기자

  감천문화마을은 현재 부산의 명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을 주변에는 1950년대 피난민들이 남긴 흔적들이 조금씩 남아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연탄창고를 비롯해서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자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감천동을 둘러보면서 발견한 오래된 오락기에서는 서울과 평양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년 전에나 볼 수 있는 오락기가 마을 어귀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감천동 주변에 전시된 다양한 작품 중에서도 정지용의 고향을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에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피난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감천문화마을은 살아 숨 쉬는 한국전쟁의 역사이자 피난민들의 아픔을 담은 마을이라고 생각합니다.



 ◎ 글을 마치며...


  감천문화마을은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만들어진 집단촌으로서 당시의 피난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 흔적이 많이 퇴색되고 있지만, 지자체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인해 1950년대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감천동의 감성적인 외면과 함께 그 속에 담긴 감천동의 이야기는 보존 가치가 있는 역사적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존 작업을 통해 감천동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때로는 지속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의 감천동은 남북분단의 아픔을 보여주는 상징이지만, 앞으로 통일 이후에는 통일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제8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백상민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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