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2월, 중국이 체포된 탈북자들을 강제로 북한으로 송환할 것이라는 소식이 보도되자 주한중국대사관 앞에서는 탈북자 강제북송을 반대하는 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최근까지도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난민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불법 입국자로 간주되어 강제로 북송되고 있지요. 그런데 약 50여 년 전에도 대규모의 북송이 이루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기가 막힌 역사의 현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1959년 12월 14일, 재일동포들을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고 있다 (출처:마이니치신문)
귀국하는 날
지금으로부터 약 반세기 전인 1959년 12월 14일, '지상낙원'으로 돌아간다는 귀국선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인공기 물결, 뜨거운 만세 함성이 3,000여 명의 환송 인파 속에 울려 퍼지던 광경입니다. 당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일본 정부, 언론에서 '유토피아'라 주장하던 조국의 땅, 북한으로 돌아갈 이 날까지 일본에 살던 우리 동포들은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기다렸을까요?
재일조선인(在日, 자이니치)은 일제강점기 시절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2차 세계대전 때 강제로 동원된 노무자들이 대부분으로, 뼛속부터 우리 민족입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마음 놓고 귀국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가족과 재산이 무사히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을뿐더러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대부분 귀국을 포기하게 됩니다. 오히려 전란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오는 조선인들이 증가하면서 재일동포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어버렸죠.
일본에 있던 우리 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라는 수식어는 재일동포의 많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박탈했고(실업률이 일본인의 8배), 이들은 엄청난 차별 대우를 감내해가며 그렇게 서러운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시 때 동원된 노무자, 밀항자,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상인…당대 재일동포들의 직함이었습니다.
타향살이와 마이너리티의 설움으로 지친 재일동포들. 그래서 더욱 "남한은 거지투성이지만 의식주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지상낙원인 북한"으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릅니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습니다. 이날 재일동포들은 인생의 모든 희망과 기대, 설렘을 안고 2척의 여객선에 올랐습니다.
'북송사업'은 대형사기극이었다
함경북도 청진항에 재일동포와 일본인 처(妻) 등 이들의 가족 975명을 태운 북송선이 닻을 내렸습니다. 이날부터 시작해 1984년까지 25년간 186차례에 걸쳐 9만 3,340명의 재일동포(일본인 6,703명과 중국인 7명 포함)들이 북송되었습니다. 하지만 황량하기 짝이 없는 청진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들이 꿈꿨던 세계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산은 민둥산이었고, 청진항 부두에 모여있던 주민들은 전시 의복처럼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본 오사카(大阪) 태생 탈북자 고정미 씨는 "청진항에 도착한 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며 울며 보채던 친오빠는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곧 '정신병환자'로 격리 수용되었다", "유골도 없이 사망통지서만 날아온 것은 8년 후였다"고 회고록에 밝힌 바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북송 재일동포들은 생사여부도 알리지 못한 채로 '조국'의 수용소로 끌려가 고문받아 죽거나 사망했으며 낡은 정신병원에 격리되기도 했습니다. 조총련의 간부나 후원자 가족이 아닌 대부분의 동포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며 북한에서 또다시 차별을 당했고,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在日朝鮮人 北送事業)'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교포들을 북한에 송환한 사업을 말하는 것으로 조총련과 북한, 북일 적십자, 일본 정부·언론의 아주 은밀한 합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업은 인도주의적 송환으로 포장된채 그 누구도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아 명백한 인권침해를 초래했고 큰 비극과 상처를 낳았습니다.
당초 이 사업이 추진되기까지는 여러가지 동기가 작용했는데요. 먼저 북한은 6·25 전쟁에 따른 중국 지원병 철수로 노동력이 절실했습니다. '재일동포의 귀국은 김일성의 따뜻한 사랑과 외교력 덕분'이라는 선전 뒤에는 사실 국가적 차원의 아주 이기적인 저의가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 일본 정부와 적십자사는 1958년부터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조선인의 끈질긴 호소"에 인도적 입장에서 관여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일본적십자사가 국제적십자위원회에 보낸 서한 에서 재일조선인은 범죄율이 높고 폭력적인 존재로 묘사되었으며 귀국을 원하는 재일조선인들의 대규모 시위로 인한 유혈사태를 우려한다는(이후에도 발생하지 않았던) 근거 없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실은 일본 정부에게 복지 예산만 축내는 사회하층민 재일조선인들은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에서 범죄율 높은 '파괴분자'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니 그럴듯한 명목만 있으면 내쫓고 싶다는 심리가 있었죠. 또 좌우 양극화가 심했던 당시 '귀국'이라는 인간적인 테마는 양측을 적절히 화합하게 하면서도 선거에서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빚어진 정치적 산물이 재일동포 북송사업인 것입니다.
'지상낙원'이라는 감언이설
북송사업은 북한과 조총련의 주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언론 또한 북송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과 언론은 좌우를 막론하고 조총련처럼 북한에 대해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선전하며 재일조선인의 귀국 사업을 아주 호의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일례로 <아사히신문>은 "귀국 희망자들 증가한 것은 북한이 '완전취업', '생활보장'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긍정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귀국자들의 편지" 1처럼 근거없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산케이신문>은 "따뜻한 숙소와 환영", <요미우리신문>은 "북으로 건너간 일본인 부인들 '꿈같은 설날' … 오길 잘했다"와 같이 조총련의 입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기사의 내용들은 전문(傳聞)으로 시작하고 교묘하게 귀국을 부추기는 내용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 (상)1960년 2월 26일자, (하)1975년 4월 19일자 귀국사업을 지지하는 내용의 '아사히신문' 기사
재일동포들은 "북에 가면 누구나 공짜로 집을 얻을 수 있고, 복지도 보장해주고, 일자리도 많다"는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일본의 사회 분위기가 극찬하던 '귀국'을, 가난과 차별 대우로 신음하던 재일동포들이 주저할 이유는 딱히 없었죠.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북한 땅에 도착하자마자 말로만 듣던 그 지상낙원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거짓과 과장이 난무하던 당대의 보도는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북송된 재일동포들의 삶이 당초 기대와 달리 생지옥임을, 이 사업을 주도했던 조총련도 인정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조선대 교수였던 박두진 씨는 재직 시절 제자들에게 '지상낙원'으로 가는 북송선을 권했습니다. 그때 북송선에 오른 제자들만 200여 명. 박두진 씨는 “북송선을 탄 제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때 북송선을 타라고 권유했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고 밝혔습니다.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하라'
▲ '북송저지밀파공작원' (출처:JTBC 추적360)
1959년 2월, 북한과 일본은 재일교포 북송에 합의합니다. 당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았고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한국대신 북한을 택한 상황이었죠. 한국 정부로서는 국가 홍보전에서 참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이승만 정권은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국내외 언론에 대대적으로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을 동원해 북송 반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북송 저지 방법을 찾던 정부가 다급한 나머지 그해 9월 '북송저지밀파공작원'을 조직한 일도 있었습니다. 66명(경찰시험 합격자 24명, 재일학도의용대 출신 41명, 예비역 장교 1명 등)으로 결성된 공작대는 북송사업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본에 잠입했습니다. 하지만 허술한 준비와 지원 단절 등으로 많은 공작단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죽거나 구치소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누구의 책임인가
지난달 15일,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갔다가 탈북한 재일동포 2세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栄子·72)씨는 재일동포 12명과 당시의 인권침해를 폭로하며 일본변호사협회에 인권구제를 요청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도 '인도적 범죄'로 인정한 북송사업 과정의 인권 유린 실태를 토대로 일본 변협은 일본 정부 등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는 중에 있습니다. 최근 북일 교섭도 진행되면서 북송사업 당시 북한에 간 일본인 아내의 송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북일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갔다가 탈북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귀국자만 170여 명입니다. 오늘날 탈북자들 중에는 '귀국자'들이 많은데다 북송사업으로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수천 명의 재일동포 이산가족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민족의 상흔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한과 일본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인 재일동포 기민정책(棄民政策)의 막중한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일본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재일동포들은 모두 안전하게 송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문희수였습니다.
참고자료
<일본에 세워진 북한의 철옹성, '조총련'>, 최석영, 인물과사상 184호, 2013.
동아일보, “北 사기극에 제자들 보내… 뼈저리게 후회”
한국일보, “지상낙원 거짓 선전… 자이니치 북송은 명백한 인권 침해”
JTBC, "재일교포 북송 저지하라" 50년전 현해탄 건넌 '특공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川崎栄子さん、北朝鮮の日本人らの帰国を訴える脱北者 "
북한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北朝鮮帰国者の生命と人権を守る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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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朝鮮帰還賞賛記事1960/02/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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