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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의 무력 도발과 테러, 어떤 사건이 있을까?

 

지난 11월 23일 화요일에 벌어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우리를 경악시켰습니다. 지난 3월 26일 천안함 공격에 이은 또 한 번의 중대한 공격행위입니다. 북한은 늘 이렇게 과감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무력행위를 자행해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현대사 6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자행되어 온 북한의 무력도발 및 테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1ㆍ21사태(청와대 습격사건)

 

1ㆍ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입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 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 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 당하였습니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습니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그 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전향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였습니다.

 

1.21사태 관련자 32명 가운데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사진 출처 : www.tongilnews.com/news/articleV...%3D76587>

 

 

2.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호가 북한의 해군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사건입니다. 푸에블로호는 승무원 83명(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을 태우고 북한 해안 40 km거리의 동해 공해상에서 업무 수행 중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었습니다. 이 때 북한 측의 위협사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도발적인 북한의 납치사건에 대해 미국에서는 즉각적인 강경한 보복조치를 취하라는 여론이 비등하였으며, 충격을 받은 전 세계도 큰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행위를 비난하고 푸에블로호 및 그 승무원의 즉각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일전(一戰)도 불사한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號)와 제7함대의 구축함 2척을 한반도에 출격시켰습니다.

 

또한 미국은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그 대응책을 강구하는 한편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소집을 요구, 북한에 대해 푸에블로호 나포(拿捕)의 부당성을 항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에 대해 나포 함정의 송환을 알선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마치 미국이 불법적으로 침략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적인 선전을 펼쳐 최대한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사건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하고 푸에블로호 함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 전자장치는 몰수하였습니다. 미국은 이 송환을 위해 북한에 대해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침범을 시인·사과하는 요지의 승무원 석방 문서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후일 미국의회에서 정치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귀환하는 푸에블로호 승무원<사진 출처 : kookbang.dema.mil.kr/kdd/MenuGis...20090716>

 

 

3. 아웅산 묘소 폭파암살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묘소에서 한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북한 테러분자의 폭파암살로 사상(死傷)한 사건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이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 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이하 여러 정부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이기백 함찹의장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화를 면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모든 방문예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습니다. 국내외의 비분과 비탄 가운데 미얀마 정부는 한국에 조문사절을 보내는 한편,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 10월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보고하였습니다.

 

미안먀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물이 터지기 직전 촬영한 한국 대표단

<사진 출처 : shindonga.donga.com/docs/magazin...80500003>

 

 

4. KAL기 폭파사건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폭파된 사건입니다. 사고기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 기착한 후, 다시 방콕에 기착하기 위하여 비행하던 중이었으며, 기내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해외근로자가 대부분인 한국승객 93명과 외국승객 2명, 그리고 승무원 20명 등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객기는 29일 오후 2시경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의 무선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사건발생 15일 만인 12월 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주입펌프 등이 파손된 KAL기 구명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됨으로써 비행 중 폭발에 의하여 추락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수사 결과 KAL기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대남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 폭발물(PLX)에 의하여 폭파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미국은 즉각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하여 각종 제재를 가하였고, 일본도 북한 공무원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1988년 2월 10일에는 이 사건의 토의를 위하여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많은 국가대표들이 북한의 테러행위를 규탄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불이익을 자초하는 결과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KAL기 폭파사건에 주범, 김현희<사진 출처  : issue.chosun.com/site/data/html_...329.html>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와 테러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입니다. 이번 연평도 도발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 지금까지 자행되어 온 각종 무력도발, 테러는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연평도 도발을 계기로 북한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해 강력 대응하는 범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평화적인 남북관계 조성을 통해 사전에 이런 불상사를 기필코 막아야 합니다. 이미 저질러진 사태에 대해선 강력하고 신속하게 대응함으로서 사태해결과 예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남북의 군사적 긴장상태와 각종 테러행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평화적인 남북관계와 같은 영구적 예방조치를 추진하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물을 서둘러 닦는 것보다 애당초 물을 엎지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합니다. 한반도에 하루빨리 평화가 정착되길 기원하며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자료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 Ency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