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신라 천년의 고도이자 시간을 넘어 문화의 향기를 만나는 곳' 경주는 차로 불과 1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입니다. 이런 지리적 접근성으로 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경주에 자주 드나들며 천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7기 통일부 기자단으로 선발된 후, '통일을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가까이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통일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다뤄 보는건 어떨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찾아 즉흥적인 경주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제가 다녀온 삼국통일의 흔적들 그리고 이를 통해 느낀 남북통일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신라 삼국통일의 위업과 호국정신을 선양하는 통일전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제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바로 통일전입니다. 통일전은 신라 삼국통일 위업과 호국정신을 선양하고 분단된 조국통일의 염원과 그 실현을 다짐하는 전당입니다. 여기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삼국통일을 기념하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제가 이곳을 방문한 날에는 현장체험학습을 온 학생들이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에 향을 피우고 참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 삼국통일기념비와 태종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의 영정
▲ 통일전 현수막과 삼국통일 주역 3분의 영정 앞에서 참배하는 학생들
저 역시나 사진 속의 학생들처럼 간단한 참배를 마치고는 바로 앞에 놓여져 있던 방명록에 '남북통일을 서원합니다'라는 짧은 문장을 적었습니다. 왜 흔하게 쓰이지 않는 단어인 '서원(誓願)'을 썼냐고요? 그 이유는 세 영웅의 영정이 위치한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두 개의 문을 통과야 하는데 그 중 두번째 문의 이름이 바로 '서원문'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이라는 단어의 뜻은 자기 마음 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운다는 것인데요. 문 이름이 뜻하는 바는 바로 삼국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것이겠지요. 과연 세 분의 삼국통일의 주역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서원을 이루어 주실까요? :)
▲ 서원문과 방명록
신라 삼국통일을 느낄 수 있는 김유신 장군묘, 태종무열왕릉, 문무대왕릉
다음으로는 삼국통일 주역의 릉을 다니며 삼국통일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고자 했습니다. 먼저 김유신 장군묘를 소개합니다!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에 김유신 장군의 묘가 위치해 있는데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던 김유신 장군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군사를 지휘했다고 합니다.
그는 태종무열왕 7년에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백제를 병합하였고, 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를 통합함과 동시에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려는 야심이 있던 당나라 군사도 물리쳐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훗날 흥무대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비석에 陵(언덕 릉)자가 보이시나요? 여기에 물을 뿌리면 신기하게도 墓(무덤 묘)자가 나타나는데 이는 김유신장군이 흥무대왕으로 추대된 후 고친 흔적이라 추측하고 있답니다. 김유신 장군묘의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숭무전이 위치해 있습니다.
▲김유신묘비석,흥무문,김유신장군묘,숭무전
태종무열왕릉입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첫 진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지만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주에 있는 많은 무덤들은 현재 그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태종무열왕의 경우, 거북받침돌 위의 비석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남아있어 이 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태종무열왕릉과 비
삼국통일의 주역 중 나머지 한 분, 문무대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감포에 위치해 있어 대구로 돌아가야하는 시간 상의 한계로 가보지 못했습니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라는 유언으로 유명하지요. 실제로 문무대왕의 유골은 감포 바다의 거대한 바위 속에 안장되었습니다. 더운 여름, 동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고 싶으시다면 문무대왕릉이 위치한 이 곳으로 오시는건 어떨까요?
신라 삼국통일을 염원을 느끼다, 황룡사지 9층목탑 터
▲황룡사지터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황룡사지 9층목탑의 터입니다.
돌에 새겨진 글씨가 보이시나요?
여기에 새겨진 내용과 같이 황룡사지 9층목탑은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세운 곳입니다.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건립된 신라보(新羅寶) 중 하나인데요, 이 탑은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신라인의 결의를 다지는 정신적 구심체로써 군신들과 백성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아 건립한 탑입니다.
신라는 이 탑을 세운지 31년 만인 문무왕 16년(676년)에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고 후세의 현철들은 이 탑을 세운 영험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45미터 정방형의 기단 위에 전체 높이 약 70미터에 이르는 한국 건축 기술의 경이로운 수준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물이었지만 고려시대에 몽고 침략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눈길을 끄는 또 한 가지는 이 목탑을 건립한 건축가 아비지가 바로 백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백제 사람이었음에도 정치와 국경을 초월하여 그의 대단한 건축 기술을 신라에까지 미쳤기에 서라벌의 터전 위에 제일의 목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에게 교훈을주는 내용이 아닐까요?
황룡사지 터의 바로 옆에는 선덕여왕 시기에 창건된 또 다른 절인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분황사도 있으니 여러분도 함께 꼭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통일의 번영을 느낄 수 있는 동궁과 월지(구.안압지)
마지막으로 경주에서 찾은 삼국통일의 테마는 통일의 번영입니다.그 곳은 바로 동궁과 월지(구.안압지)입니다.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 궁궐터의 하나로,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였습니다.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입니다. 동궁과 월지는 야경으로도 아주 유명한 곳이랍니다. 감상해보실까요?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 야경 (네이버캐스트)
동궁과 월지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인 14년(674년)에 지었습니다. 통일신라의 번영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할 수 있어요.이곳에서 잠시 남북통일이 된 직후에 우리나라가 이루어 낼 번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통일된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요? 통일신라를 뛰어넘는 번영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동궁과 월지를 마지막으로 이른바 '삼국통일 투어'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남북통일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신라 삼국통일의 긍정적 효과와 한계점
신라의 삼국통일은 여러가지 의의가 있습니다. 우선,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각기 다른 나라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과 문화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통일된 하나의 나라에서 하나의 문화를 누리며 국가공동체 및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한민족 공동체는 국력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기존에 시시때때로 일어난 정복전쟁이 일단락됨으로써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신라인의 위상을 높이는데 긍정적 영향을 주었죠. 또 통일신라에서 '문화'라는 아이콘을 빼놓을순 없죠! 하나의 국가체제 속에서 백성의 응집력을 기반으로 하여 통일신라는 삼국의 문화가 결합된 더욱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또 기술의 발전도 가속시켰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단기간에 삼국 백성의 응집력이 생겼을까요?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면서 삼국 백성 간의 대결은 약화되고 민족 공동체로서의 동족 의식이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식의 근원은 '우리는 뿌리가 같은 한 민족'이라는 민족 의식이 있었을 것이라는 걸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는 이렇듯 우리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한계점도 있습니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 모두를 신라에 복속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발생한 긍정적 효과와 한계점 모두는 우리의 남북통일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선조의 선례를 남북통일의 지침으로 삼아 궁극적으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통일시대를 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으로 제7기 통일부기자단 서민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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