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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가다 (1) 핵 없는 세상을 꿈꾸며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한 평화로운 항구도시 히로시마 상공에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아침을 맞아 분주히 갈 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공중의 시커먼 물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 순간, 번쩍! 밝은 빛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펼쳐진 참혹한 광경. 살아남은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과연 그날 그 시간에 히로시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폐허가 되어버린 군사도시 히로시마

평화로운 항구도시였던 히로시마(広島)는 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도시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또한 1894년 청일전쟁을 지휘하기 위한 대본영(大本營: 전시 중 일본 천황의 직접 지휘를 받는 일본 육·해군 최고 통수기관)을 설치하면서  히로시마는 철저한 군사 거점도시로 개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태평양전쟁 당시 히로시마는 일본군의 제2사령부와 통신센터, 병참기지가 위치한 일본 제일의 군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시시각각 불리해지는 전세 속에서 최후의 발악을 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 600m 지점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원자폭탄 한 발을 투하하였습니다. 눈을 멀게 할 정도의 섬광과 함께 작렬한 원폭은, 폭심지로부터 2km에 이르는 시가지의 건물을 흔적도 없이 부숴버렸습니다. 폭풍과 열선 등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만 1945년 12월 말까지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됨) 그리고 불과 사흘 뒤인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 한 발의 원폭을 투하하였습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일본은 이튿 날인 10일,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고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 원폭 투하 후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광경, 뒤로 원폭 돔이 보인다. (출처: http://blog.naver.com/ljh5752/60112764957)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 세워지다

원폭이 불러온 결과는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군국주의 사상에 빠져 끝 없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전개하던 일본은 원폭 투하로 인해 전쟁의 두려움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참한 전쟁이 없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 지역을 항구적인 평화의 상징도시로 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49년 8월 '히로시마 평화기념 도시건설법'을 공포하고 기념시설을 정비하였습니다. 그 후 피폭 50주년을 기념하여 1999년 정비되면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유래입니다.

기념공원을 가다

평화기념공원의 입구인 '평화의 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상이 있습니다. 이른바 '폭풍 속의 모자상'입니다.  원폭 투하 당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동상에서 전쟁의 고통과 아픔을 처절하게 느껴집니다.


▲ 평화의 문   ▲ 원폭사몰자 위령비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일대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일대


기념공원의 중앙에는 '원폭사몰자 위령비'와 '평화기념 상', '보리수의 비', '평화의 등불', '평화의 연못' 등 평화를 염원하는 조각상과 비석 등을 집중적으로 조성해놓았습니다. 이것을 정중앙에 배치함으로써 이 비를 중심으로 평화의 기운이 히로시마를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인 듯했습니다.


▲ ▶ 원폭의 어린이 상

'원폭의 어린이 상'은 2살 때에 피폭 당한 사사키 사다코씨가 10년 후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동급생들이 "원폭으로 사망한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위령비를 만들자"고 호소하여, 전국의 3,200여 개 학교와 전 세계 9개국으로부터 기부받아 1958년 5월 5일 완성된 것입니다.

상의 높이는 9미터로, 그 위에는 종이학을 받쳐 든 소녀의 브론즈상이 세워져 있으며,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상 밑에 놓인 석비에는 '이것은 우리들의 외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세계에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듭니다.

 

기념공원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전시물은 역시 '원폭 돔'입니다.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이었던 이곳은 원폭에 의해 대파, 전소되어 건물 내에 있는 전 인원이 즉사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골만 남아 아주 흉측스러운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요, 관람객들은 원폭돔에서  전쟁의 공포를 느끼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고 합니다. 이 전시물은 핵무기의 참화를 전하고 세계평화를 끊임없이 호소하기 위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상징물로 자리하고 있으며, 1996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원폭 돔


▲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출처: 연합뉴스)

이곳에는 우리 한국인에 대한 기념물 또한 설치되어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입니다. 원폭 투하 당시 강제 징용되어 일본에서 혹사당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 역시 원폭에 의해 사망하였는데요, 강제 징용으로 타지에 끌려와 노역을 하다가 원폭에 사망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히로시마현본부가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머나먼 땅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만 했던 우리 조상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아울러 원폭 문제는 일본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핵 없는 세상, 전쟁 없는 세상

원폭 투하의 결과는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투하 지점으로부터 반경 2km 이내에 있던 모든 건물과 사람이 흔적도 없이 불타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원폭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방사선의 영향으로 살아남은 자들에게까지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원폭을 맞아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피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은 발열, 구토, 설사, 출혈, 탈모 등 다양한 증상에 시달렸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피폭의 영향은 유전자의 변형까지 일으켜, 피폭자들은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출산해야만 했습니다.

핵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10.4 남북공동성명 발표 6주년이 되는 지난 10월 4일, 북한은 국방위원회 성명으로 ‘북한 군대와 인민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강성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핵무력과 경제건설의 병진노선을 굳게 틀어쥐고 변함없이 전진해 나갈 것’이라며 핵무장에 대해 변함없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핵무기가 가져올 결과를, 그리고 전쟁이 가져올 결과를.


- 이어지는 2부에서는 평화기념자료관과 DMZ 세계평화공원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충북일보 2013년 4월 9일자 기사

2. 오마이뉴스 2013년 5월 25일자 기사

3, 경향신문 2013년 6월 5일자 칼럼

4. 연합뉴스 2013년 8월 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