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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북중접경지역 탐방 시리즈① 뤼순감옥을 찾아서

천현빈 기자의 북중접경지역 탐방시리즈 제1탄 '뤼순감옥을 찾아서'입니다. 뤼순 감옥은 중국 대련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북중접경지역을 시작하는 첫 코스로 지나칠 수 없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고, 남북한 역사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곳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위치해 있는 뤼순 감옥은 우리말로 여순감옥이라고 합니다. 공식 명칭은 뤼순형무소로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언급되고는 합니다. 그 이유는 갖은 고문 도구와 비인륜적인 수감시설 등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뤼순감옥의 지하 감방을 보면 그 잔혹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간수에게 저항하거나 감옥 내 규정을 위반하면 형벌을 주는 곳인데, 습기가 매우 심하게 차고 빛도 잘 들지 않는 좁은 면적의 방입니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내부의 수감자를 관찰 할 수 있게 한 것도 특징입니다.











뤼순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차지하면서 러시아가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수감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뤼순을 점령하면서 1907년 증축, 지금의 규모가 되었습니다.

뤼순감옥에는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상당했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난 뒤,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항일지사들이 무참하게 체포당하여 수감되었고 갖은 고문으로 죽어나갔습니다. 공식적인 처형 숫자만 해도 1942년에서 1945년 짧은 시기에 약 700여 명 이상의 수감자가 사형 당하였습니다.



뤼순감옥은 1909년 아시아 침략의 원흉으로 불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장소이자 역사학자로 유명한 신채호 선생이 옥사하기도 한 장소입니다.


1902~1907년에 설립된 뤼순감옥은 약 26,000제곱미터의 면적으로 275개의 감방이 있으며 동시에 2천 명 정도를 수용 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입니다. 구역이 여러 곳으로 나눠져, 담장 내에는 사형집행실, 고문실 등이 위치해 있고 담장 밖으로는 강제노동 시설과 과수원 등이 있습니다.

1945년 8월에는 소련 붉은 군대가 뤼순에 주둔하면서 뤼순감옥의 사용이 중지되었습니다. 그후 1971년 재정비를 통해 관광객들에게 전시관으로 공개된 이곳은 1988년 중국정부에 의해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뤼순감옥의 곳곳을 돌아보면서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반인륜적이고도 처참한 곳인 동시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지사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과 북으로 나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마음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던 역사의 한 조각입니다. 남과 북의 공통분모인 역사의 한 부분을 우리는 이렇게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뤼순감옥의 여러 현장을 돌아보면서 '통일된' 민족의식과 역사의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뤼순감옥은 통일의 밑거름이 되는 역사적 교훈을 주는 곳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