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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찾아서

남도의 안보현장을 찾아서 떠나는 안보견학 시리즈 제1탄입니다.

안보라고 하면 최전방, 강원도, 최북단과 같은 지리적 특징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멋과 맛이 충만한 남도에서의 안보탐방지역은 어디가 있을까요? 먼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찾았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6.25 전쟁 당시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거제도에 설치한 수용소입니다. 당시에는 거제도로 가는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기에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또한 거제도는 대한민국 부속 도서중에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그 면적 또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1951년부터 당시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하였고, 1983년 12월 20일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상남도 거제시 고현동 362에 위치한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고현터미널에서 버스로 약 5-10분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성 또한 뛰어납니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입구는 이러한 모습입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의 국기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안보견학을 하고 있었는데, 눈여겨 볼 점은 상당수의 외국인들도 포로수용소를 관람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6.25 전쟁이 단순히 국내전쟁이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국제전이었음을 입구에서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탱크전시관입니다. 6.25 당시 사용되었던 남과 북의 탱크의 종류와 모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입니다. 전쟁 당시 북한의 핵심전력이 바로 탱크입니다.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북한의 육군력은 남한을 압도했습니다. 당시 제대로 된 탱크전력을 갖추지 못한 남한은 전쟁초기 북한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과 생활상 및 폭동현장을 재현한 디오라마관에 들어가면 포로들의 노력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현된 밀랍인형들 뿐만 아니라 실제 그 장면들을 담은 비디오 녹화자료들이 상영중이었습니다. 실제자료를 보고 재현된 모형물을 보니 그 실감이 배가 되었습니다. 1951년 6월까지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공군 포로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성포로를 위한 수용시설도 따로 존재하였습니다. 매우 험악한 전쟁분위기 속에서 이념대립이 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미 육군 F.T.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일이 발생하는 등의 일을 보면 그 당시 포로수용소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포로들의 사상 대립을 실감나게 표현한 곳입니다. 포로들 간의 사상 대립을 매직비전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직접 사람이 연기한 것을 3D로 입체적으로 구현하여 포로들의 사상 대립을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표현한 곳으로 그 당시의 이념대립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포로폭동체험관입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의 격돌 장면을 첨단 복합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곳입니다. 내부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 형식의 무빙워커에 올라타면 엄청난 음향효과가 관람자를 압도합니다. 각종 비명소리와 총, 칼소리는 그 당시의 처참함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관리소장인 도드 준장의 납치장면도 실감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포로수용소는 제네바 협정에 의거하여 포로들의 인권을 보장했으며, 식사같은 경우는 오히려 한국군보다 질적으로  좋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처우개선에 관한 것보다는 사상대립으로 인한 반공-친공포로들간의 심각한 대립이었습니다. 6.25전쟁이 이념의 대립으로 발생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역시 이곳 포로수용소에서도 이념대립이 극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폭동을 일으키는 현장을 실감나게 재현한 모습입니다.

포로수용소에는 이외에도 분수광장, 철모광장, 흥남철수작전기념비, 무기전시장, 6.25역사관, 포로생활관, 극기훈련장, 포로생포관, 여자포로관, MP다리, 송환심사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포로설득관, 포로수용소유적관, 포로수용소의 막사와 감시초소를 실물로 재현한 야외막사, 경비대장 집무실과 경비대 막사, 그리고 무도회장 등의 잔존하고 있는 유적지, 기념촬영코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의 마지막에는 포로 귀환 및 송환 열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포로들이 드디어 자유를 찾아 남한 잔류를 결정하는 과정을 사진자료와 함께 기차 측면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사진속 포로들의 표정은 자유를 갈구하는,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향해가는 설렘이 가득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유엔군 사령부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를 분리, 분산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1952년 8월까지 북송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거제도, 용초도, 봉암도 등지로 갔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제주도, 광주, 논산, 마산, 영천, 부산 등으로 이동되어 소규모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승인되고 33일에 걸쳐 거제도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이 모두 북한으로 송환되면서 거제포로수용소도 폐쇄되었습니다.

이렇게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여기에서 포로수용소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와 비교되었습니다. 무려 60여 년 전에도 제네바 협정에 의해 포로들의 인권을 보장해주려고 노력하였는데, 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꼬리없는 짐승'들이 산다는 말로 알 수 있듯이 그 인권유린의 처참함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와 일인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의 차이의 역사적인 단면입니다.

자유와 인권보장의 높은 희망을 안고 남한행을 택한 반공포로와 북한으로 다시 갔던 친공포로들의 대립 역시 현재 남북간의 격한 대립의 축소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역사적 아픔을 뒤로하고 이념과 사상의 대립보다는 민족의 화합과 평화가 절실한 때입니다. 지난 과거에 잘못된 판단으로 북한으로 갔던 친공포로들의 사례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사상과 안보의 교육 또한 필요한 때입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민족의 아픔을 되풀이 하지 말자는 역사적인 교훈의 장소로서의 그 가치가 충분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