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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백범 김구의 통일 이야기, 그 두 번째 이야기

-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전쟁(동족상잔 내전) 방지와 남북협상 제의

앞서 살펴봤듯이 나는 UN소총회에서 결의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네. 만약 남과 북, 각 지역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면 '내전'이 일어날 우려가 매우 컸기 때문이지. 헌데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들은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진통일'을 하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네. 물론 북쪽에서도 북쪽에 단정을 수립하고 남진하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 이는 실로 위험한 생각이었네. 생각해보게. 결국 무력으로 통일을 이룩한다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반도는 피폐화되고, 수많은 국민들은 모두 죽겠지. 혹시라도 일본이 이를 틈타 다시 무력 침략을 시도할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무력을 이용한 통일만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했다네.

(사진: 경교장 앞에서 밀집한 군중들 - 출처: 경향신문)


두 동강 정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실시하여 남조선 정부를 수립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북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위험한 말이다.··· 동족상잔과 망국멸족의 참극을 조장하는 자의 정체가 참으로 우리 한국사람인가 생각해보라. 그러면 우리 삼천만 동포가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는가?"

1948.3.20. 「건국실천원양성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보낸 치사」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남북에서 외부의 힘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왈 남정(南征)이니 혹왈 북벌(北伐)이니 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만 전쟁이 폭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리는 길 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하지만 남과 북이 제각각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형국이었기에 나는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지. 특히 북한은 남한보다 한 발 더 앞서 단독정부 수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네. 그들은 194711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12월에는 '임시헌법초안'을 완성시켰네. 나는 이것이야말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일으킬 전초현상으로 이해하였네.


남북협상 제의

이제 더 이상 UN에 기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나는 북쪽의 지도자들과 만나 단정수립으로 인해 발생할지 모르는 내전의 위험을 알려주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을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네. 그래서 나는 1948216일, 북측에 '남북협상'과 '남북지도자회의'를 먼저 제의하였네.

70평생을 동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고 독립을 위하여 사는 나로서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우리 삼천만 형제가 한없는 지옥의 구렁으로 떨어지려는 것(한국전쟁을 의미)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북조선에서 김구가 항복하러 온다느니 회개하였느니 여러 가지 말이 있는 듯하나 지금은 그러한 것을 탓할 때가 아니다. 이것도 외국인의 말이 아니고 피를 같이 한 동족의 말이니 무슨 허물이 있는가. 나는 여하한 모욕과 모략을 무릅쓰고 오직 우리 통일과 독립과 활로를 찾기 위하여 피와 피를 같이한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려고 결연히 가련다.

1948.4.17. 「서울신문」

북측은 325일 나의 제의에 동의하고 평양에서 만나자고 응답하였네. 아마 북한은 "설마 김구가 오겠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네. 북한의 답을 받자마자 평양으로 출발했는데 가는 길에 '김구, 이승만 타도'라는 글씨가 북한 전역에 쓰여져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지. 나중에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농담 삼아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아랫사람들이 잘못한 것 같다."고 변명을 하더군.

(사진: 평양에서 만난 김구와 김일성 - 출처: 연합뉴스)


아무튼 나의 남북협상 제의에 대하여 통일을 염원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반대여론 역시 만만치 않았다네. 나의 평화통일노선이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었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따끔하게 말했다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

신민일보 사장과 회담기」

하지만 나 역시 자신은 없었네. 당시 심각한 남북한 정세로 보아 남북협상이 단번에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하지만 당장은 통일을 이루지 못할지언정 한민족은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므로, 나는 이번 회담이 미래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 되길 바랐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통일에 대한 희망이 생길 것이고,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통일을 위해 힘써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세.

그리고 마침내 1948년 4월 19일, 나는 경교장을 떠나 북으로 향했네.

(사진: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떠나는 김구 일행 - 출처: 네이버)


 

남북협상

나는 서울을 떠난 다음 날인 420일, 김일성을 만났네. 김일성은 나를 보자마자 21일 열리는 '남북조선제정당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유하였네. 그들은 나를 연석회의에 참석케 한 뒤에 자신들이 마련한 헌법을 공식적으로 통과시키고, 정부수립을 제안함으로써 자신들의 선전에 이용하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지. 그의 속셈을 파악한 나는  "연석회의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과의 단독회담을 요구하오. 그리고 당신들이 마련한 헌법은 곧 북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 아니오!"하고 일갈하였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끈질기게 연석회의 참석을 요구하였고, 나는 "이번 방문의 목적은 오로지 정치범 석방, 38선 철폐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한 것이오."라고 답하며 거절하였네.

하지만 그들과 협상을 위해서는 나 역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여겼네. 김일성의 제의로 나는 주석단에 보석되었고, 422일 열린 연석회의에 참석하여 남측 요인을 대표하여 5분 동안 축사를 하였네. 하지만 나는 그들에 의해 이용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지. 하여 나는 축사를 통해 "이 회의는 통일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계책을 토론하는 자리여야하며, 나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합니다."라고 공개적으로 그들의 계책을 비판하였네.

(사진: 연석회의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김구 - 출처: http://blog.naver.com/cle58/80149528666) 

 

(영상: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김구 - 출처: 국가기록원)

그러자 나를 이용해 자신들의 단독정부 수립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북측 지도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그들이 애초에 기획했던 헌법의 통과와 정부수립 제안은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네. 나는 이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요인회담을 강력히 요구하였네. 결국 나와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김회담'의 형식으로 426일부터 30일 사이에 회담이 열렸네. 장시간의 논의와 검토 끝에 우리는 합의를 보았고, 430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네.

1. 소련이 제의한 외국군대 즉시 동시 철거는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이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야 한다. 일체 애국인사들은 반드시 양군 철병안을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간부들이 다수히 있다.

2.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외군철거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통일에 대한 조선인민의 지망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3. 외군철거후 서명한 제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즉시 수립할 것이다. 이 정부는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천만여명 이상을 망라한 남북제정당사회단체들이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므로 단독선거가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며 기만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남북회담에서 위와 같은 결의를 통과시키고 55일 서울로 돌아왔네. 하지만 위의 공동성명서는 머지 않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곧이어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고 말았네. 기어이 내가 우려했던 남과 북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만 것일세.

지금까지 남북 각 지역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어떤가? 그대들 역시 나의 생각과 노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내가 우려했던 바와 같이 결국 1950년 6.25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남과 북의 지도자 모두가 나의 간곡한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더라면,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더라면 과연 그러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 나는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 뿐이라네.

어느덧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네. 다음 세 번째 이야기는 드디어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 같네. 비록 남과 북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동족상잔의 내전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네.  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전개했던 통일을 위한 마지막 노력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끝내고자 하네.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주시게.

- 세 번째 이야기(마지막 이야기)에서 계속됩니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논문] 한국의 남북분단과 백범의 통일론, 신용하, 백범김구기념관, 2012

2. 경향신문

3. 연합뉴스

4.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