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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백범 김구의 통일 이야기, 그 첫 번째 이야기

모두들 안녕하신가?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일세. 자유롭고 활기찬 2013년의 대한민국을 보니 주권을 잃고 이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던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네. 나의 후손들이 이렇게 번영된 나라에서 잘 살고 있다니 기쁘기 그지 없네만, 아직도 내 가슴에 맺힌 한(恨)이 풀리지 않고 있으니, 나는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네.

(사진: 백범 김구 - 출처: 백범김구기념관)

나의 한이 뭐냐고? 바로 '통일'일세.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분투하였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먼저 떠날 수밖에 없었네. 하지만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도 모두 슬기롭게 극복해냈던 우리 민족이기에, 비록 나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내 후손들은 통일이라는 나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네. 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서로 간에 피를 흘리고, 이제는 분단이 공고화되어 일체의 교류조차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네.

하지만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네.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통일을 원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내가 전개했던 통일운동의 간략한 역사일세. 부디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대들이 앞으로의 한반도 통일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일세. 그럼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네.


국에서 들은 독립 소식

내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것은 1945810일이었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중국 서안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OSS훈련을 참관하던 중이었지. 무더운 여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땀을 흘려가며 훈련을 받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우리 손으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네.

하지만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거늘 그만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네. 그 소식을 들은 나의 심정은 어떠했겠나? 무척이나 기쁘지 않았냐고? 물론 일본이 항복한다는데 왜 난들 기쁘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실망스럽고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네.

내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토록 한 것, 그리고 미국과 합동으로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하려 했던 것은 모두 한국의 독립은 우리 스스로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국제사회에 표명하려는 목적을 갖고 시행한 것이네.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여야만 훗날 일본이 철수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당당히 주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이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권이 약화될까 그것이 두렵고 걱정되었네. 하지만 설마 조국이 둘로 나뉠 것이라고는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네.  

(사진: 한국광복군 - 출처: 경기신문)

822일 나는 중국 국민당 비서장과의 회담에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 양군의 분단점령과 군정 하에 일단 놓이게 된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네. 기어코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만 것이었지. 일제에 의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거늘, 또다시 주권을 남들에게 넘기게 되었다니 실로 하늘이 무심하게만 느껴졌다네.


새로운 목표 수립

주권을 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현실은 비참했다네. 19451123, 명색이 정부 수반이었던 우리 임정 요인들은 정부 요인의 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조국 땅을 밟아야 했다네. 이런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나는 아직 조국을 위해 해야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그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네.

(사진: 백범 김구 환국 사진 - 출처: 미디어오늘)

나는 조국 땅을 밟자마자 해방의 감격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다음 날, 동포들에게 드리는 성명서를 발표했지.

나와 나의 동지는 통일된 독립 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수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속이나 물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완전히 독립 자주하는 통일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 분투합시다.

- 1945.11.24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일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나는 이제 다시 '통일된 조국의 자주독립'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남은 평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네.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 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조국은 현하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하는 단계에 처해 있다. 우리의 통일·독립이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을 것이다.

- 「단결로 독립 엄수」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좌우합작운동 전개

그러나 국제 정세는 계속 심각하게 돌아갔다네. 194512,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은 미, 소에 의한 남북의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네. 나는 이에 분노하여 즉각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의장으로서 반탁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하였지. 나는 즉각 임시정부 포고령을 내려 미군정 기관의 한국인 직원들까지도 모두 우리 임시정부의 신탁통치 반대 지휘 명령을 따를 것을 포고했다네.

(사진: 백범 김구의 반탁운동 연설 - 출처: 백범김구기념관)

당시 내가 꿈꾼 대한민국은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미국과 소련의 내정간섭 없이, UN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해서 통일된 국회를 구성하고 처음부터 대한민국의 통일된 자주독립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는 것이었네.

하지만 일은 쉽지 않았네. 한국인들 중에서도 이념과 정책 노선이 서로 다른 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각자의 방식을 주장했고, 이 와중에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말까지 나왔네. 나는 갈수록 마음이 급해졌네. 우선 국내의 분열된 국론을 통일하고 통일정부 수립에의 목표를 다함께 추진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지. 단독정부 수립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네.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서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해야지, 각각 남북 단독정부를 세우게 된다면 통일은커녕 내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네.


UN 총회 결의 지지와 통일 대한민국

혹자들은 내가 UN에 협력하지 않았다거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연합국과의 협조가 부족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맞지 않네.

19471114UN 112차 총회에서 UN 감시 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와 UN임시위원단 설치, 통일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 철퇴안이 가결되자, 나는 이를 적극 지지하였네. 나는 오히려 UN의 결정을 지지하고 존중하면서 나의 유일한 목표인 통일자주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네.

그들이 우리에게 약속한 대로 신탁 없고, 내정간섭 없고, 또 남북을 통한 총선거에 의하여 자주통일의 독립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여줄 뿐 아니라, 그 정부로 하여금 즉시로 한국의 통치권을 결함 없이 행사할 수 있게 하여 약속한 기일에 미, 소 양군이 철퇴한다면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이다.

- 1947.12 「간절한 염원」

하지만 소련이 UN한국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절하자, UN소총회는 더 이상 남북한 총선거가 아닌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고 의결하였지. 이것은 곧 남한만의 총선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또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나는 극렬하게 반대하였다네.

금차 UN에서의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거니와, UN소총회가 일개 소련의 태도도 시정하지 못하고서 한국문제에 대한 UN의 결정에 위반되는, 남한에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파산을 세계적으로 선고함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절대 다수의 애국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만 계속 분투하겠다.

- 1948.2.27 「UN소총회 결의에 대한 반박」

(사진: 광복 1주년 축사 - 출처: 뉴시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 설정한 이른바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 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우리 민족의 참화가 이에서 더할 것이 없다. 반쪽 정부에 대하여는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첫째는 UN의 이름을 빌려서 1국 신탁을 실시하려는 간사한 계책을 철회하여야 할 것이며, 둘째는 미소 양국이 획정한 38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이요, 셋째는 우리 국토를 양단함으로써 민족을 분열시켜 동족끼리 상잔하는 비극을 초래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삼척동자로도 이것을 독립이라고 기뻐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 1948.3.21 「혁명운동 재출발의 신결심: '신민일보 ' 사장과 회담기」

여기까지가 남한에서 전개했던 나의 통일운동에 대한 간략한 역사일세. 이처럼 나는 국내외적으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싸워가며 오로지 조국통일을 위해 절치부심하였지만, 정세는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네.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자, 북쪽에서도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네. 나는 남한의 단정수립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당연히 북한에서 단정수립을 하는 것도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 생각했네. 결국 나는 이 상태로는 안된다고 판단하여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을 벌이기로 작정했다네. 다음 이야기에서는 바로 그 남북협상에 대해 자세하게 다뤄볼 예정일세.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이 기사는 독자들이 보다 쉽게 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실제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과 사료 등을 바탕으로 백범 김구 선생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논문] 한국의 남북분단과 백범 김구의 통일론, 신용하, 2012, 백범김구기념관

2. 경기신문

3. 뉴시스

4. 미디어오늘

5. 백범김구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