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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400년 고려의 숨결을 찾아서 : 개성역사유적지구 (하)

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성은 400여 년동안 고려의 수도로 그 시대의 찬란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문화유적과 유물로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북한은 이곳을 개성역사지구로 지정해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것인데요. 아직 "개성역사유적지구"에 어떤 유산들이 포함되었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개성이 고려왕조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볼 때 고려성곽과 만월대, 선죽교 등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개성의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1. 고려의 성곽

개성 외벽에 건축된 나성의 모습 (출처:http://north.nricp.go.kr/nrth/kor/cul/gallery.jsp?cp_nm=개성 나성(옛성)&cpsno=289&media_sno=1)

개성에 남아 있는 고려의 대표적인 성곽으로는 나성을 들 수 있습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도읍 개경에 궁성과 황성(발어참성)만을 축성하였으나, 11세기 초 거란족의 침입을 계기로 도성 내 주요 시가지를 둘러싸는 나성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나성은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길이는 약 16km입니다. 송악산 마루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식 도성입니다. 나성내부에는 궁궐, 황성, 내성 외성으로 구획하고, 주요통로에 성문을 배치해 물자와 사람을 관할하였습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나성의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4대문은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이라 불렸습니다. 나성에 성문이 많은 것 역시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과 다른 점인데,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으며, 북창문과 북소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2. 만월대

고려궁터 만월대의 전경 (출처:http://north.nricp.go.kr/nrth/kor/cul/gallery.jsp?cp_nm=만월대&cpsno=132&media_sno=1)

만월대는 고려의 궁궐터를 말합니다. 고려는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을 왕궁과 궁성의 이중구조로 만들었는데요  만월대는 송악산 남쪽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고 여러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대부분의 궁궐들이 평평한 지형에 넓게 자리를 잡아 별도의 축대를 쌓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된 것에 비하여 만월대는 경사지를 이용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태조의〈훈요십조>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풍수도참설을 신봉한 고려가 풍수상 지기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축조방식으로 해석됩니다. 

만월대라는 명칭도 원래의 이름이 아니며 빈터만 남아있는 궁궐을 보고 사람들이 임의로 부르던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함으로써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만월대는 회경전 중심의 외전 일곽, 장화전 중심의 내전 일곽과 서북쪽의 침전 일곽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궁궐과 달리 남북 중심축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하지 않고 지형에 따라 축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중심건물 주변의 기하학적인 배치개념은 유지하되 전체적으로는 지세에 맞도록 궁궐 건물 군을 자유로이 배치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이렇게 뛰어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만월대는 919년(태조 2)에 건설된 이후 현종대의 거란 침입, 인종대 이자겸의 난, 고종대 몽고 침입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고, 공민왕 대 홍건적의 침입 때 불에 탄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3. 선죽교

정몽주의 충절이 살아숨쉬는 선죽교 (출처:http://north.nricp.go.kr/nrth/kor/cul/gallery.jsp?cp_nm=선죽교&cpsno=277&media_sno=1)

선죽교는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피살된 장소로, 이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았다 하여 선죽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리 규모는 길이 8.35m, 폭 3.36m 인데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며, 5경간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부분이 높고 가장자리가 낮은 안정된 모습을 띠고 있는 선죽교는 일반적인 옛 다리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다리 위 석조물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이 다리를 잘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구조물 입니다. 석물 가운데에는 범자 2자가 보이는데, 이는 개성시 묘각사지에 있는 다라니석당의 일부를 가져다 사용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선죽교 바로 옆에는 나란히 붙여 가설한 좁은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선죽교 통행을 대신하는 나중에 만든 다리이고, 그 외에도 선죽교 바로 옆에 명필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와 동쪽에 여러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이것들은 정몽주와 관련된 인물들의 비입니다.


4. 숭양서원

정몽주와 서경덕을 모시는 숭양서원 (출처:http://north.nricp.go.kr/nrth/kor/cul/gallery.jsp?cp_nm=숭양서원&cpsno=385&media_sno=3)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1573년의 건물로 지금까지 설명한 유적지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서원입니다.

《중경지》에 의하면 1573년 개성유수였던 남응운이 정몽주와 서경덕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문춘당을 짓고 정몽주를 주향(主享)으로 두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선조로부터 ‘숭양(崇陽)’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하는데요

근처에는 조선후기 이후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 2개가 비각 안에 들어있고, 북쪽 것은 1740년 영조가, 남쪽 것은 1872년 고종이 개성에 와서 그의 충절을 기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개성에 위치한 대표적인 문화유산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문화 유적지들이 아직 개성에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개성은 찬란했던 고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자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의 공간이 아쉽게도 북한의 관리 소흘과 방치로 인해 빛을 바라고 있지만, 이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개선되어 나가길 바라며 앞으로 통일 후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알려줄 수 있는 고려문화역사지구의 중심지로 자리잡길 기대해봅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상생기자단 5기 서진화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료참고 :

-북한문화재자료관 (http://north.nricp.go.kr/nrth/kor/inx/index.jsp)

-연합뉴스 : 북한, 개성역사지구 세계유산 등재신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660853)

-우리문화사랑방 : 개성의 역사와 남겨진 문화재 2005.07.16

-역사비평 54호 pp.195-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