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의 문화재 복원, 사실과 날조의 취사선택 (상)

<정릉사(定陵寺, 左)와 단군릉(檀君陵, 右)의 전경>
출처 (정릉사) : 미디어붓다, 평양 동명왕릉옆 정릉사 (2010년 3월 2일)
출처 (단군릉) : 민족의 소리, 북측 개천절은 94년 단군릉 완공되고부터 (2010년 10월 3일)


  평양(平壤)은 고대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경주와 함께 ‘천년고도(千年古都)’인, 유서 깊은 도시이다. 그러한 만큼 많은 문화유산이 존재하였지만 오랜 세월의 전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어 그 터만 황량하게 남아있어 왔다.

  하지만 북한은 그러한 고조선과 고구려의 흔적만 남은 주요 문화유산을 관광수입의 획득과 체제 선전용으로 쓰기 위하여 복원하는 데에 힘썼고, 그에 따라 많은 문화유산이 복원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복원의 ‘고증(考證)’에 있어서 사실 또는 날조의 '취사선택'을 보인다는 것이다.

 과연 이 복잡한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북한의 대표적 복원문화유산인 정릉사와 단군릉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사실을 택하다. - 정릉사 복원


 고구려 때 지어진 사찰인 정릉사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73호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릉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절은 오랫동안 그 터만 남아왔으나 1974년에 이르러 북한에 의해 발굴, 복원되었다.

<정릉사 보광전(普光殿)> 지붕 용마루 양 끝의 치미(雉尾)와 기와가 붉은 것이 보인다. 출처 : 통일뉴스, <포토> '개천절방북단'의 평양 1박2일 (2005년 10월 5일)


 그런데 복원된 정릉사를 보고 있으면 고건축의 문외한이 보더라도 흔히 보는 조선시대의 양식이 아닌 그 옛날 고구려 시대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재현해냈음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의 지붕 용마루를 보면 새의 날개처럼 생긴 장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장식을 '치미(雉尾)라고 하는데 근세의 고건축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으로 주로 고대의 고건축 유적에서 출토된다.


<발해(渤海)의 치미> 고구려와 같은 양식의 발해 치미. 치미는 한국의 경우 주로 고대의 건축에서 나타났다. 출처 : 고등학교 국사, 국사편찬위원회

 또한 정릉사의 지붕을 보고 있으면 여느 고건축의 기와와는 그 색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바로 정릉사 경내(境內)의 모든 건물들이 검은색이 아닌 붉은색의 기와지붕인 것이다.

 흔히 한국 고건축의 기와 색을 무조건 검은색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붉은 기와의 사용은 매우 정확한 고증이다. 실제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인 평양 안학궁(安鶴宮)과 서울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출토된 기와 유물을 보면 5세기 이후의 고구려에선 붉은색의 기와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단청(丹靑) 역시 고구려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고증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해당분야의 전문가인 김봉건 前 문화재연구소장이 '평양지역 사찰 둘러본 김봉건 문화재연구소장 (현대불교, 2003년 3월 22일)'이라는 인터뷰에서 정릉사의 단청 문양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말할 정도로 당대의 양식을 잘 재현해내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묘사된 단청> 정릉사 단청의 색채와 문양이 고구려 고분벽화를 충실히 재현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곽동해, 한국 단청의 원류, 학연문화사, 2011년

<정릉사 어느 전각의 내부> 공포(貢包)의 단청 색채가 고구려 벽화와 유사하다. 출처 : 연합뉴스, 합장하는 북한 스님 (2008년 10월 09일)

 이처럼 정릉사 복원의 경우에는 북한이 정확한 고증에 상당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북한이 문화유산 복원시의 고증에 있어서 사실을 택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하였듯이 그들은 필요에 따라 사실의 증명과 날조를 통한 왜곡을 손바닥 뒤집 듯 택하는 '취사선택의 체제'이다. 도대체 그 날조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며 왜 그러한 날조를 택하는지에 대해서는 날조를 택한 복원문화유산, 단군릉(檀君陵)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②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