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2부의 순서로 납북자와 납북자 가족의 이야기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증언자는 김성호 목사님으로 6.25 전쟁 납북 인사가족협의회 명예 이사장님이었습니다. 납북자는 그의 아버님인 김유연씨로 황해도 웅진에서 1901년에 태어나셨으며, 당시 경성신학교 교수(현 서울신대)이며 신덕교회 담임목사셨다고 합니다. 경력으로는 동아일보 기자, 동아일보 경성 지국장을 맡으셨으며 납북일은 6.25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1950년 8월 23일이라고 합니다. 납북 장소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자택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8.15 광복 후의 정국과 사회의 혼란이 조정국면에 이를 무렵, 한국 개신교계도 교회와 신학교가 재건의 터전을 다져가면서 발전의 비전을 보기 시작했으나 북한에서 엄청난 적화통일을 획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교계 지도자는 전무했다고 생각된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북한 신의주에서 일제강점기 목회 사역을 했던 경험은 있었지만 전쟁의 위기가 오리라는 예측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특히 납북된 김유연씨는 신의주 교회에서 재직 시,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을 비밀리에 송달하는 역할도 하였다고 합니다.
납북 경위를 살펴보면, 1950년 포성이 들렸으나 설마하는 마음으로 정부와 군을 믿었던 아버님은 결국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이후 험난한 나날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교회와 학교를 지킨다며 서울사수를 고집하였습니다. 그 즈음, 누군가 검은 지프차를 타고 자택으로 찾아와서 부친(김유연씨)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질문에 대한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아버님의 양 손을 잡고 지프차로 끌고 가 강제로 태우고 가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종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1950년 8월, 50 여명의 종교계 인사들과 평양 근교, 중화면 농가에 분산 수용, 1951년 5월 초, 대동군 문성리 농가에 수용되었으며 1951년 7월, 결국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와 은밀하게 연락하던 중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연행 후 다시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서포터즈의 질문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납북된 부친을 찾기 위해 HID북파 공작원까지 지원했다고 하는 김성호 명예 이사장님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김성호님은 부친의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알고자, 그 부대에 자원하였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전쟁의 정보를 모으고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부친의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많은 질병과 고난을 겪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납북 이유는 무엇일까요. 북한이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수립한 전쟁계획과 함께 한국 내 정치, 사회, 문화, 언론, 학계, 종교계, 농민, 어린 학생까지 망라하여 납치한 이유는 다각도로 연구 할 과제입니다. 그 가운데 종교계 인사의 납북 이유를 살펴보면,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장악할 때 가장 크게 저항한 세력이 조만식을 비롯한 기독교계 인물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탄압과 말살을 계획하면서 북한의 교회지도자와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탈출하였고, 북한의 남침 후에는 남한 각지에서 교회지도자와 신자들을 다수 학살했으나, 일부 특정 지도자들은 납북하여 김정일 종교화 정책에 이용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납북종교인 대다수는 끝가지 굴종하지 않고 죽음을 마지 했으리라는 것이 조철씨(죽음의 세월 저자, 납북자인사 북한 수용소 생활기)의 증언입니다.
즉 북한에서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포장했던 모습을 볼 때, 남한의 종교 지도자와 신학교 교수를 납북한 이유는 주체사상의 3대 주축인 창조, 생명, 공동체 사상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상과 유사하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625번째 서포터즈 임명식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습니다. 생생한 납북 경위를 듣고 보니, 험난했던 당시의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의 생생한 경험이, 저에게 전달되어 마치 당시에 있는 것처럼 처철함과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국민 보호는 국가의 존재 의미입니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주권 국가의 자국민 보호 최우선 책무이며 국가의 존재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납북자와 그들의 가족의 진상규명을 하는데는 갈 길이 멀지만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그분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는 큰 발걸음을 했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강제납북에 대한 규명을 밝히는 것은 정부와 그들만이 아닌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 나아가야할 숙원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의 관심과 참여 하나 하나가 모여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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