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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이야기/정책 돋보기

[테마시리즈: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네번째 이야기

 

  

[테마시리즈: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네번째 이야기

박정희 정부의 통일정책

 

 

1972년

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헌정 기능이 일시 중단되는데 이를 10월 유신이라 하며 이에 따라 새로운 제 4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제 4공화국의 통일 정책은 대체로 이전의 제 3공화국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통일 정책들을 발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유엔에서 자신의 통일 방안을 선전하며 북한의 통일 공세에 대응하였다.

 

 

1973년

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대화의 경험과 국제 정세의 추이에 비추어 통일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7개 항목에 달하는 “평화 통일 외교 정책에 관한 특별 선언” 즉 소위 “6․23 선언”을 발표하였다.

 

 

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 과업이다. 우리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모든 세력을 계속 경주한다.

② 한반도의 평화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며, 남북한은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침략을 하지 않아야 한다.

③ 우리는 남북 공동성명의 정신에 입각한 남북 대화의 구체적 성과를 위하여 성실과 인내로서 계속 노력한다.

④ 우리는 긴장 완화와 국제 협력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 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⑤ UN의 다수 회원국의 뜻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북한과 함께 UN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UN 가입 전이라도 대한민국 대표가 참석하는 UN 총회에서의 한국 문제 토의에 북한 측과 같이 초청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⑥ 대한민국은 호혜 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⑦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은 평화 선린에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우방들과의 기존 유대 관계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갈 것임을 재천명한다.

 

이 7개항의 제의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고집해 오던 기존의 통일 원칙인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UN감시 하의 자유 총선거'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7개항의 제의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 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 따른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처 방안으로 평가한다. (중략) 전세계가 박정희 대통령이 선언한 평화 통일 정책을 한반도의 평화 정책과 통일을 위한 장기적 포석으로 환영한다”

 

따라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 정책으로 생각할 수 있다.

 

6ㆍ23 선언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정부의 능동적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대외적인 상황을 보면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해 미ㆍ소 양극 시대에서 미ㆍ일ㆍ중ㆍ소ㆍ서구의 5강 시대로 세력이 개편되는 동시에 동ㆍ서 평화공존, 긴장 완화, 현상 고정화 등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와 더불어 한국도 대 UN 외교와 통일 외교에서 선도적이며 진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비적성 공산 국가와의 문호 개방 원칙을 밝히게 된 것이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탈냉전을 지향한 주변 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북 대화마저 대남 적화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남한에서는 북한을 국제 사회에 공동 참여 시킴으로써 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촉구하게 된 것이다.

 

 

1974년

74년 1월 18일 남북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와 같은 해 8월 15일의 평화 통일 3대 기본 원칙에서도 6ㆍ23 선언의 내용이 재확인되면서 그 내용이 구체화 되어졌다.

 

 

74년 1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에서 가진 연두기자회견에서 한반도에 현존하는 대결 관계를 평화공존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평화 정착 방안으로서 남북한이 “상호 불가침 협정”을 체결할 것을 북한 측에 제의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러한 불가침 협정은 73년 3월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서 북한 측이 제의한 평화조약 안에 대한 대안으로 제의되었으며 8ㆍ15선언과 6ㆍ23선언에 입각하여 한반도에 평화 정착을 현실적으로 구현시키기 위한 제의였다.

 

 

① 통일 수단으로 상호 무력이나 폭력 침범 포기

② 상호 내정 불간섭

③ 휴전 협정의 효력 유지

 

이러한 협정의 체결은 전쟁으로 인한 다방면의 피해 방지와 휴전협정을 남북 협정으로 전환시켜 우리민족의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민족적 역량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미국에 의존되어 있는 통일 정책을 자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하여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다시 강조하면서 “평화 통일 3대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제안은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제시해 온 통일 정책의 기본 방향을 정리하여 명백히 제시하였다.

 

<평화 통일 3대 기본원칙>

① 한반도 내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남북한 상호 불가침 협정을 체결한다.

② 남북한은 상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남북 대화를 진전시키고, 다방면의 교류와 협력을 해야 한다.

③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 하에 토착 인구 비례로 전 한반도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

 

 

이는 71년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의, 72년의 7ㆍ4 남북공동성명, 73년의 6ㆍ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 74년의 남북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등 일련의 통일 정책을 종합 정리한 70년대 남한 정부의 통일 정책의 기조를 이룬다. 평화 통일 3대 기본원칙은 ‘선평화 후통일’ 정책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 정책은 토착 인구 비례를 조건으로 하여 은연중에 남한 주도를 암시하고 종전의 UN 감시라는 것이 빠진 것이 특이한 점이다.

 

 

1975년

75년 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 회견에서 남북한 불가침 체결을 재차 촉구하고 휴전협정 효력이 계속 유효할 것을 전제로 UN군 사령부의 해체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1977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 회견에서 불가침 협정이 체결된 이후 주한 미군 철수까지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즉 먼저 UN군 사령부의 해체까지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부터 휴전 협정 당국자들의 합의에 의존하겠다는 입장을 볼 수 있다. 또 주한 미군의 철수까지도 의제로 포함하여 논의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불가침 협정 체결을 위한 남북 회의 개최를 촉구한 것이라는 의미도 볼 수 있다.

 

 

1978년

78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통해 남북한의 교역, 기술 협력, 자본 협력의 길을 트고 이를 효과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쌍방의 민간 경제계 대표들이 참여하는 남북한 경제 협력 촉진을 위한 협의 기구 구성을 제의하고 필요하다면 관계 각료 회담을 가질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남북한 사회생활에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라도 교류를 실시함으로써 5천만 민족 전체의 복지를 증진하고 이울러 남북 상호간에 신뢰를 회복시켜 나가자는 의미에서 교역, 기술, 자본의 협력을 위한 ‘민간 경제 협력 추진 협의 기구’의 건설을 제의하고 필요하다면 관계 각료 회의를 가질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 측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1979년

79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 회견에서 그 동안 중단되어 온 남북 대화를 재개하기 위하여 어떤 시기나 어떤 장소, 어떤 수준에서든 아무런 구애됨이 없이 남북한 당국자에 무조건 직접 대화를 갖자는 ‘1ㆍ19 남북한 당국 회담’을 다시 제의하였다.

 

 

“나는 어떠한 시기나 어떠한 장소에나 또는 어떠한 수준에서든 남북한 당국이 서로 만나서 아무런 전제 조건도 없이 허심탄회하게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을 막고 5천만 민족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가 하는 제반 문제들을 … 직접 논의하기 위해서 대화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은 제의는 모처럼 남북한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던 대화 통로인 남북조절위원회와 남북 적십자 회담이 모두 남북한간의 의견 차이로 장기간 중단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남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자가 무조건 직접 만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제의였다. 이 제의에서는 그 동안 북한이 거부해 온 문호 개방도 요구하지 않았고, 인적․물적 교류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고위 정부 당국자들이 직접 만나 허심탄회하게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자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래서 북한 측이 제시한 문제를 포함하여 남북한의 모든 문제들을 폭넓게 협의할 것을 표명하였으며, 어떤 수준의 회담도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필요하다면 정상회담까지도 고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1ㆍ19 제의로 발트하임 UN 사무총장이 남북 대화를 추진 시키고자 평양과 서울을 방문하였으나 북한의 거부로 별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북한의 입장을 생각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방침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1979년 7월 1일 한ㆍ미 양국은 카터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발표된 공동 성명에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대화 재개를 촉진하기 위해 남ㆍ북한ㆍ미국 고위 3당국 대표자 회담을 북한 측에 제의하였다. 한ㆍ미 양국은 “긴장을 완화하고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켜 궁극적으로 한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어떠한 조치도 남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간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어 한․ㆍ미 양국은 공동 성명의 발표와 동시에 남북한이 같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인도네시아 정부를 통해 3당국 회의를 북한 측에 공식을 전달했지만 북한은 UN 대표를 통해 같은해 7월 10일 3당국 회의를 정식으로 거부하고 미국과의 쌍무 협상만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박정희 정권은 문을 닫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후반부의 통일 정책은 자주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면서 한반도 분단 문제가 우리 민족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이를 풀어 나가고자 했다. 이와 관련한 선언문과 회담 제의를 통해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선평화 후통일이라는 통일원칙을 제시하여 통일을 무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하고자 했다. 통일정책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기대에 부응할만한 북측의 대응이 없어 허공의 메아리와 같은 느낌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통일정책들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현재 통일정책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