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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이야기/정책 돋보기

[테마시리즈: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첫번째 이야기

 

  

[7월의 테마:역대 정부의 통일정책]첫번째 이야기

미군정 시절 통일정책

  

 

<1>  역사적 배경


다시는 일어나서 안되는 것, 바로 많은 사람의 희생이 뒤따르는 전쟁이다.

많은 사람의 희생과 함께 발발한 당시뿐만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그 여파가 남아있는 전쟁.

특히 전쟁 이야기를 하면 제2차 세계대전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숱한 잔재를 남긴것 만큼이나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역사적으로 뛰어난 걸작품도 많이 남겼으니 UN헌장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945년 6월 26일에 서명되고, 10월 24일에 발효한 UN헌장은 

국제공동체에 대한 국제상의 규율이 실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UN 헌장이 채택된지 2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에 옆나라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제국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중국 및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 이 떠오른다.

소위 냉전으로 불리는 미ㆍ소간의 대립 등 국제관계는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후 한반도는 얄타회담(45년 2월)이라는 비공식 회담에 의해 합의된 사항으로 인하여
1945년 9월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동안 38선 이남지역은
미군정(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

38선 이북지역은은 소비에트 연방군에 의해 군사통치를 받았는데 
이러한 군사통치의 모습으로 인하여 한반도는 많은 혼란을 겪는다. 
1945년 9월 8일 존리드 하지 중장의 미국의 제24군단은 인천에 상륙하여

미군이 38선 이남지역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군정을 펼 것이라고 공식 포고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9월 14일에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하고 미군장교를 각 국장에 임명한다.

이러한 미군정의 시기는 약 3년간 지속되는데 1947년 미ㆍ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국은 UN에 한국 중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자는 안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가결됨에 따라 48년 5월 10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미군정은 끝나고 만다.

 

 

여기서 잠깐, 너무 어려운 내용 속 잠깐 쉬어가는 시간!

야간 통행 금지에 대해서 아세요?^^

 

야간통행금지는 자정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했던 제도

줄여서 ‘통금’이라고 불렸는데 바로 이 통금이 미군정시기에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

여러가지 불편함과 웃지 못할 추억들을 가져다 준 통금은

1945년 9월 7일 미군정 포고령 1호에 따라 치안 및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시작된 이래

82년 1월 6일 폐지되었습니다!!


 


<2> 세계속의 남과 북의 정세

 

자체적으로 미국은 민주주의를, 소련은 공산주의를 설립하면서

한반도를 통치했던 군정으로 인하여 남북은 갈라지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분단이라는 용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원래 분단(Division)은 책임보다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발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간혹, 분단이라는 표현보다는 분할(Partition)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반도를 주변강대국들의 의지로 분할해 버렸다는 의미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심각히 침해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둘로 갈라진 한반도의 상황에서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남북협상은 보다 강경해지고 한반도의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어진다.

바로 이 시기에 국내 정치 세력들 중 중도 좌파나 중도 우파 세력들에 의해서 남북 협상론이 제기된다.

      (이승만, 김구, 하지 미군정 책임자 하지 중장)

 

그러나 이는 남북한의 서로 다른 이해 관계 때문에 실패하게 되고 말았다.

남한의 경우, 전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한민당이 단독정부 수립을 고수했고

미군정에 즉각적인 단독 선거 실시와 정부수립을 요구했다.

북한에서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찬탁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던 시기에 민족이 둘로 갈라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던 김구와 김규식 등은

1948년 2월 16일 북한 정치 지도자인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요인회담 개최를 제의했으나

이마저도 김일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결과만을 낳고 만다.

 

 

 

<3> 냉전의 상징, 한반도 

당시 상황은 이처럼 정치적 권력투쟁이 심각하여 혼란스러운 양상이었다.

 

민족적으로 어떠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든 간에

결론적으로 한반도는 우리나라 정치인들 각자의 선택에 따라서

소련과 미국의 힘의 대결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이 되었고, 따라서 미군정 시기의 대북정책은

북한을 향한 정책이 아닌 소련을 향한 정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인데 소련은 북한을 소비에트화 시키는 것에만 주력했다. 

 

정리하자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파워게임의 장이 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정책 목표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들에게만

양국이 정권 장악 기회를 부여했던 데서 입증된다.

그들은 그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적대적인 국내 정치세력들을 회유했으며

때론 과감히 제거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논의보다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한 두 국가에게 유리한 정부를 세우는데 보다 심혈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와 남과 북, 정치인들의 사욕이 더해져 분단이 고착화 되어졌다.

 

아픈 상처의 치료를 위해서 바르는 소독약도 맨 처음 바를 때는 매우 쓰라린 법.

소련의 북한통치, 그리고 남한 미군정의 시기는

이제 막 일제시기의 상처를 치료하려는 한반도에 아픔의 시간이었다.

세계의 패권 갈등과 냉전 상황이 한반도에 그대로 투영된 시대적 아픔인 것이다.

그 시기가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