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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이야기/정책 돋보기

[테마시리즈: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두번째 이야기

 

 

[테마 시리즈: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이승만 초대 정부의 통일정책

 

한반도는 전 세계적으로 냉전의 잔재가 남아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또한 북한의 핵보유 선언 등과 같은 문제와 더불어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는 8ㆍ15 해방 뒤 발발한 6ㆍ25전쟁 이후 60년 동안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펼쳐왔다.

 그러나 때로는 북한을 주적으로 간주하여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포용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등 대북정책이 일관되지 못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였는데, 이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내 정치상황과 국제정세의 영향 때문이었다.

 

 통일은 한반도와 우리의 생존이 달린 중대한 문제이다. 통일을 이루기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 가운데 한국 정부의 통일 정책은 실효성 면이나 파급력 등에서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남다르다. 때문에 한반도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역대 정부의 대북ㆍ통일 정책을 살펴보는 것은 분단의 극복과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수해야 할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오늘 이 시간은 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중 이승만 초대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승만 정부는 UN의 감시 하에 선거가 실시된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곧 북한을 남한과 같은 동등한 정부(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승만 초대 정부 시절부터 민주화 이전 군사정권 시절까지 쓰였던 북괴라는 명칭은 북한을 남한과 동등한 정부로 보는 것이 아닌 '북쪽의 괴뢰도당'이란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UN총회 결의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북한도 대한민국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북한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1. 무력 북진 통일과 6․25전쟁

 

 이승만 정부의 통일정책 중 가장 핵심은 6ㆍ25 전쟁 발발 직전까지 국내외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해온 무력 북진 통일이다.‘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문구는 이승만 정부의 통일정책을 함축하는 대표적인 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본인은 물론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일부 내각 관료들까지 무분별하게 무력 북진 통일을 외쳤다.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고 극동 지역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동북아 지역의 긴장상태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가운데 이승만 정부의 호전적인 통일정책은 불필요한 군사적 마찰을 원치 않는 미국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비유했다. 미국의 지원 아래 국민당 정부는 모택동의 공산당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민당 정부는 국공합작(國共合作, 중국에서 혁명을 수행하거나 일본의 침략에 대해 투쟁하기 위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하는 것.)을 거부하고 1945년 10월에 체결했던 평화 협정(쌍십협정, 어떤 일이 있어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 ·자유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을 파기한 뒤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돌입했다.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인식한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근거하여 공산당은 내전 기간 중 세력권 내에서 토지 개혁 등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부의 분위기에 걸맞게 농민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홍군의 도덕적 모습은 공산당이 중국 인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1947년 말 전세를 완전히 역전 시킬 수 있었다. 공산당과는 달리 무능과 부패로 인해 중국 인민들의 인심을 사로잡지 못한 국민당 정부는 결국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하여 중국 본토를 내어주고 타이완으로 쫓겨났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정부에 원조했던 미국의 군사 물자가 거꾸로 공산당 손에 들어가 국민당 정부를 패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역사적 경험을 미국은 잊지 않고 있었다. 민족 반역자들의 국정 장악, 해방 이후 권력 투쟁으로 인한 사회 혼란의 야기, 사회 전반에 걸친 심각한 부패 등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이반되어 있는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에 내전이 발발할 경우 장개석 정부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무력 북진 통일을 강하게 우려했고 만약 남한이 실제 북침을 하게 된다면 모든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은 미국의 원조 없이 국가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 했기에, 미국의 이러한 경고를 이승만 정부가 무시하고 북침을 강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한의 북침을 우려한 미국이 군사적 원조를 잠정 중단하고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언한 미국 극동 방위선 애치슨 라인으로 인해 남한의 안보가 우려할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도 이승만 정부는 전쟁 발발 직전까지 무력 북진 통일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 6ㆍ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인 1950년 6월 18일에 찍힌 모습.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은 신성모 국방장관) <출처 : 오마이 뉴스> 

 

 무력 북진 통일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문제는 그것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무력 북진 통일이란 명칭에 걸맞게 북침을 할 만한 군사력을 키우지도 못했을 뿐더러 적어도 남침에 대비한 최소한의 군사력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전쟁 개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될 정도로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다.

 

 ▲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의 모습.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정작 6ㆍ25 발발 후 서울 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 나갔다. <출처 : 오마이 뉴스>

 
 

2. 진보당 사건

 

 비극적인 6ㆍ25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부는 더욱 철저한 반공을 유지했다. 통일 정책과 관련해 무력 북진 통일을 제외한 다른 어떤 노선도 모두 용공으로 몰았다. 반공의 서슬이 시퍼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56년에 창당한 진보당은 당시 절대적으로 금기시 되었던 평화 통일론과 국제 연합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이 주장은 북한 노동당 정권과 그 배후의 국제 공산 세력인 소련 및 중국이 주장하는 중립국 감시 위원단 감시하의 총선거안과 비슷했다.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은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여 표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자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과 독재 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6ㆍ25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던 비극적 경험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이승만 정부의 무력 북진 통일에 반감을 가지고 진보당의 평화 통일론을 환영했다. 제 3대 대통령 선거 결과와 평화 통일을 원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이승만 정부는 위기를 느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자 정치적 위협의 대상인 조봉암과 진보당은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평화 통일 방안을 주장했고 북한의 간첩들과 접선했다는 혐의로 간첩죄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 및 해체 되었다.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처형되었다.

 

 진보당 사건의 재판 당시 모습. 맨 오른쪽 인물이 진보당 위원장 죽산 조봉암이다.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평화 통일론 등 통일 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동결되었고 혁신 정당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전쟁 직후 순전히 경험에서 우러 나오는 반공과는 별개로 정권의 안위를 위해 반공과 무력 북진 통일을 앞세워 여러 활발한 통일 논의 자체를 차단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이승만 정부의 태도는 비판 받을 점이 많다. 전쟁 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반공과 무력 통일은 당연한 전제이자 자연스런 사회적 현상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통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여러 논의가 활발히 진행 되었더라면 60년이란 긴 세월동안 분단이 고착화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논의는 남과 북의 견고한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상생과 공영의 평화통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자신이 곧 진리이고 이를 따르라 강요했던 국가가 책임질 수 없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전쟁이란 비극으로 국민을 내몰고 다양한 언론을 통제해 역사적 발전을 퇴보시킨 전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60년 전 일은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통일 정책 공과에 대한 평가 작업은 앞으로도 활발히 진행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