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제9기 통일부기자단 황주룡 기자입니다. 이번에는 저번 기사에 이어 제2차 북핵위기부터 다뤄보려 합니다.
▲94년 북미 간의 제네바합의 장면. (한겨레 자료)
우선 저번 기사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뤘듯이 김정일과 미국 간의 적극적인 협상 결과, 94년 10월이 되면 북미 간의 제네바합의가 체결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제네바합의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습니다. 제네바 합의 내용 중 경수로 건설도 도중에 중단되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미국과 북한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차질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호간의 불신이 깊어졌던 시기는, 2000년도에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입니다. 클린턴 행정부와는 정반대로, 대북 강경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북미 간의 협상이 힘들어진 면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까닭에 북미 관계는 다시 나빠졌고, 북핵 문제와 관련한 북핵위기는 또다시 시작됩니다. 이 때 진행된 양상을 제2차 북핵위기라고 부릅니다. 이제 진행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 봅시다.
▲ 2005년 1월 부시 대통령 2기 취임식 사진. 본문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자료)
우선 2002년 10월이 되면 미 국무부에서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고 발표합니다. 이로 인해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제2차 북핵위기는 미 행정부의 성격 변화와도 크게 맞물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화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죠?
일단 2001년 1월이 되면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게 됩니다. 이 때 새로운 공화당 정부가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가 ABC 정책입니다. 일명 'Anything But Clinton'으로, 클린턴 시절에 채택했던 정책은 다 폐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도 전면 재검토에 들어갑니다. 이에 따라 2001년 6월이 되면 부시 행정부가 대북정책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게 됩니다.
원래는 제네바합의에서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가로 경제적·에너지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었습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안 외에 추가 사항으로, 북한의 포괄적인 군비와 관련한 사항을 모두 협상 테이블에 올려 놓고 재협상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북한은 이에 거절합니다. 이미 제네바합의가 있으니 재협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협상을 안 하겠다고 하여 북미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게 됩니다.
▲ 9·11 테러 당시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자료)
이런 와중 01년 9월에 9·11 테러가 발생합니다.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납치하여 WTC(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받아, 두 개의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면서 수천 명이 뉴욕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대외정책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경한 방식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안 그래도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대외 정책에 있어서 민주당 정부보다 훨씬 강경한 입장인데, 테러를 겪게 되면서 일명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하여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외정책 전통은 어떻길래 정책의 기조 변화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정책에서의 고립주의와 국제주의의 차이입니다.
고립주의는 주로 공화당 쪽에서 선호하는 정책 기조입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당장 해결해야 할 국내 문제도 많은데, 왜 해외에 많은 원조를 해 주고, 군대도 파병하는 것인가?' 이런 입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로 미국은 해외 분쟁을 중재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쓸 게 아니라, 그런 인력과 자원을 국내 문제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화당이 선호하는 고립주의 전통입니다.
반면 민주당은 국제주의 전통이 강합니다. 미국은 세계의 패권 국가로서, 전세계적인 안보 문제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인 균형자·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해외 분쟁 등에 외교적·군사적 개입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무튼 가뜩이나 공화당은 고립주의 전통에 따라 해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보통 강경하게 대응해 오곤 했는데, 9·11 테러가 발생하고 나서 더욱 강경해진 것입니다.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미국이 안보 위협오소를 제거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공격을 벌일 수 있따는 것입니다. 이는 '부시 독트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시 독트린은 왜 문제가 될까요? UN 수립 이후 국제법상 선제공격은 엄밀히 말해서 침략 행위로 간주됩니다. 자국이 군사적으로 침략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나라에 대해 선제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면 침략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UN 안보리는 UN의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하여 침략국을 집단적으로 응징합니다. 이것이 UN의 '집단안전보장'입니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은 '예방적 선제공격'이라고 하여, 미국의 안보가 위협하게 느껴진다면 상대방을 먼저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이는 역시 UN이 상정하는 국제법의 규범 상 침략 행위입니다. 그래서 당시 부시 독트린에 대해 말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부시는 부시 독트린에 입각해서 많은 지역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부시는 예방적 선제공격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이란, 이라크, 북한을 공개적으로 '악의 축'을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세 군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2001년 당시 셋 모두 대량살상무기인 핵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이에 부시가 '악의 축'이라고 강력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이라크 전쟁 당시 사진. (bing 검색)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북한은 2002년 12월에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합니다. 바로 이 시기 이후의 북한 핵개발 문제를 제2차 북핵위기라고 부릅니다. 당시 북한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NPT 탈퇴도 선언합니다. 그러다가 03년 3월이 되면 중국이 3자회담을 제안합니다. 중국·북한·미국이 모두 베이징에 모여서 회담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 때 중국은 1차 북핵위기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중재자로 나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이라크 전쟁의 발발이고, 또 하는 중국 내부의 경제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우선 중국의 경우 2000년대 초반에 꾸준히 경제성장을 해 왔고, 중산층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들도 펼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입장에서는 뭐가 중요했을까요? 주변에, 특히 한반도에 분쟁이 생기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이후부터 계속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에 다시 문제가 발생해 버리면, 지정학적인 이유로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경제 건설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도 심지어 미국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 부담감이 클 것입니다. 중국은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2003년 3월 8일 미국은 이미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일이 잘못되면 미국이 이라크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군사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1차 위기때와는 달리 중재자로서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며칠 뒤 3월 19일이 되면 이라크전쟁이 실제로 발발하기도 합니다.
▲ 03년 8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6자회담의 각국 수석 대표단. (연합뉴스 자료)
아무튼 중국은 이라크 전쟁을 보고, 그리고 중국 내부의 경제성장 등의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북핵 문제에 적극적인 중재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북핵 3자회담이 2003년 4월에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3자회담은 상호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별로 성과 없이 끝나게 됩니다. 이는 나중에 여러가지 외교적인 접촉을 통해 8월 27일이 되면 6자회담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즉 제1차 6자회담이 개최됩니다. 여기에는 미국,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남한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6자회담 성립이 보여주는 의의는 무엇일까요? 북핵 문제가 남북 당사자로는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남북 당사자 간에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있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과의 협의를 통해, 한반도에 핵무기를 생산하거나 배치하지 않기로 합의합니다. 사실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배경 중 하나로, 전세계 차원의,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탈냉전기가 있습니다. 바로 냉전기에 배치된 대한민국 내 미국 전술 핵무기들이 91년에 다 철수된 것입니다. 한반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냉전 종식 이후 전세계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가 다 수거된 것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도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을 인지하였고, 북한 당국으로서도 핵무기 개발을 하다가 국제적인 간섭, 경제봉쇄 등의 조치를 당하니 일정 부분은 포기하는 제스쳐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뒤에서 몰래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북핵 문제는 남북 당사자를 넘어 주변국들의 문제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 2005년 9월 19일 북핵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에서 6개국 대표단들의 회담 직후 모습. (연합뉴스)
어쨌든 이런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한 후 05년 9월 19일이 되기까지 국제정세는 계속 긴장상태에 머무릅니다. 05년 9월 19일이 되면 9·19 공동성명이 채택됩니다. 9·19 성명의 핵심 내용은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여, 북한은 핵 개발을 중단하고, 북한 이의 다른 나라들은 북한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을 해 주고, 외교적으로도 북한이 정상적으로 국제사회에 편입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성명 세부 내용에는 북한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일본과도 수교를 맺을 수 있도록 주변국들이 협조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외교의 기치 하에서 한국이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면서, 북한은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되고 냉전의 대결 구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여, 북한도 서방세계와의 수교를 맺을 수 있게 도와주자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다음 3부 기사에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기사는 2005년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 사태부터 시작하여 최근 핵실험까지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만나요~
* 시리즈로 기사 보기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① : 제1차 북핵위기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② : 제2차 북핵위기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③ : 제1차~5차 핵실험
<참고자료>
왕선택, 『북핵위기 20년 또는 60년 : 왕선택 기자의 북핵연표 해설』, 선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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