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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이 남한의 수해 재난때 원조를 보낸 적이 있다?? 없다??

1984년 서울 대홍수, 북한 김일성이 남한에 구호물자를 보내다.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많은 분들이 TV나 인터넷 뉴스에서 보셨을 것 같습니다만, 현재 북한 함경북도에서 홍수가 크게 발생하여 많은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현 정부 내에서는 북한에게 구호 물자를 보내야한다, 말아야한다는 의견이 분분히 맞서고 있습니다. 구호 물자를 보내지말아야 한다고 하는 측은 지난 9월 9일 북한의 5차 핵실험 및 지난 여러 도발을 강조하며 구호 물자 보내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고, 구호 물자를 보내야 한다고 하는 측은 그래도 북한 주민은 우리 한반도의 한민족이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호 물자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진: 구글 코리아, '북한 함경북도 홍수''

많은 분들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라고 하면 구호 물자를 보내야 한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하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처럼 북한보다 우리나라가 경제력이 매우 강하니 북한에게 그러한 구호 물자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북한이 남한에게 구호 물자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이후, 북한이 남한에게 재해로 피해입은 주민들을 위해 구호 물자를 보낸 기록이 딱 한 번 있습니다. 바로 1984년 9월 초에 발생한 '서울 대홍수'때였습니다.

'사진: 구글 코리아, '1984년 서울 대홍수''

당시의 홍수는 정말 어마어마한 정도였습니다. 1984년 9월의 강수량은 강수량 기록을 시작한 1903년 이후의 손에 꼽힐 만한 엄청난 강수량을 기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로, 버스, 가옥, 농지 등등이 침수되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개통 준비중이었던 서울 지하철 3,4호선의 개통 역시 이 홍수로 인하여 몇 개월 더 지연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지하철들 역시 운행이 중단되어 교통이 마비되는 사태도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관공서, 경찰서 등이 침수되어 공무집행에도 큰 차질이 발생하여 많은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적 피해에는 수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사망자와 실종자들도 적지 않은 수가 있었습니다.

 

'사진: 구글 코리아 '1984년 서울 대홍수''

이러한 남한의 상황을 지켜보던 북한 정권은 남한에게 북한적십자사를 통해 구호물자를 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북한은 예전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인해 남북 대화가 경색되자 수해 구호물자 전달을 통해 물꼬를 트고자 하였고, 남한의 전두환 정권은 곧 있을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위한 한반도 평화분위기 조성이 매우 시급했기 때문에 그러한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웅산 테러사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진: 구글 코리아, '아웅산 테러 사건'', 아웅산 테러 사건: 북한이 1983.10.9 당시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전두환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 사건. 1983년 10월 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당시 정부의 몇몇 인사들은 북한이 이러한 상황을 자신들의 선전체제용으로 이용할 것이라며 북한의 구호물자를 받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한 정부는 이러한 반대속에서도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1984년 서울 홍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진: 구글 코리아, '1984년 서울 대홍수''

북한은 1984년 9월 8일 공식적으로 방송을 통하여 남한 수해지역 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과 시멘트,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하였고, 이에 남한은 그해 9월 14일 수락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어 18일에 대한 적십자 이영덕 부총재는 북한적십자사 한웅식 부위원장과 판문점에서 실무접촉을 가졌고, 북한의 구호물자 전달 방법 등을 논의 하였고, 최종적으로 9월 29일~10월 4일 동안 육해로를 통해 북한 적십자사의 수해물자가 전달되었습니다. 남한 정부는 이에 대한 답례로 담요, 카세트, 라디오 등의 답례품을 전달하였습니다.

1984년 서울 홍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진: 구글 코리아, '1984년 서울 대홍수''

구호물자로 전달된 북한의 쌀은 주민들에게 분배되었으나, 북한 쌀이 좋지 않아 떡을 해먹는 자도 있었고,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실향민도 있었는 등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북한의 구호물자를 받는 것에 있어서 여러 우려와 걱정도 있었지만, 6.25전쟁 이후의 최초의 남북간 물자교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경색된 남북분위기가 해빙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해 10월 12일 남측은 북측에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하며 화답했고, 이듬해에는 73년 이후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됬고, 또 그 해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습니다. 북한의 구호물자 수락을 하면서 우려했던 점보다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외교가 아니었나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