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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의 쿠데타 시도 - 8월 종파 사건, 프룬제 사건, 6군단 사건

북한은 계속되는 고통스러운 경제난과 김정은의 공포정치로 혼란스럽습니다.

최근 태영호 공사의 탈북을 보아도 이 때문에 북한 사회의 핵심 계층이 서서히 붕괴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시됩니다.

이러한 혼란 속, 지난 7월 말 미국의 한 전문가(미국 국제전략연구소 마크 피츠패트릭 소장)는 김정은은 권력을 당 중심으로 집중시키고 있어서 이에 반감을 가질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비록 엘리트 계층의 일부만 붕괴하였고, 공포정치로 권력자들을 숙청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체제의 붕괴의 가능성은 아직 미비한 수준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북한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북한은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의 반체제 활동 시도가 있었습니다.

'시도'라는 것은 즉,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한의 쿠데타. 어떠한 이유로 세 번의 쿠데타가 시도되었는지, 그리고 각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1. 8월 종파 사건

위 사진은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배경) 북한 초기 국가 수립 과정에서는 4개의 종파가 있었다.

김일성이 이끈 갑산파, 김두봉이 이끈 연안파, 허가이가 이끈 소련파, 박헌영이 이끈 남로당계

한국전쟁 후, 김일성은 완전한 정권을 쥐고 싶었지만 종파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과정) 1956년, 김일성이 해외로 순방을 나가 있는 동안, 연안파, 소련파는 조선노동당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그들은 김일성을 주석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당정책을 비판하였고, 김일성이 시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등 종파유익설을 내세웠다.

김일성 계열이 이에 반박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김일성은 이 소식을 듣고 곧장 귀국을 하였으며 그들을 '반당종파분자'로 곧바로 규정하여 출당시켰다.

 

결과)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 이후로 대대적인 사상 검증이 들어갔다. 주모자와 연루자를 색출했고 당증 교환사업을 벌여 사상을 점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일성에 반대했던 세력은 모두 현직에서 철직 혹은 추방되었고,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숙청작업은 마무리되었다.

 

의의) 김일성은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북한 내의 정적이나 견제세력들을 대부분 숙청했고 1인 독재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2. 프룬제 군사대학 사건 (아카데미야 사건)

위 사진은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배경) 북한은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모스크바에 있는 '프룬제, 쥐꼬브, 워러쉴로브 군사아카데미야'로 불리는 군사대학을 비롯해 군사작전 부문, 각 병종 군사기술대학에 약 250여명을 유학시켰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그 당시는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당시 북한 내 최고 엘리트층이었던 이 유학생들은 덕분에 사회주의의 붕괴 과정과 그 원인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고,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과 독제세습정권을 향한 불만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과정) 소련이 붕괴되면서 북한 당국은 군사유학생들을 북한의 각 군사대학으로 철수시켰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퍼져있던 북한 정권에 대한 의심과 거부감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들은 각자 북한 내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던 중에 공개적으로 자주 모였고 비밀리에 모의를 하게 된다. 그 모의를 통해 그들은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들 방식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로 합의를 한다. ‘실제 거사를 모의한 반정부 기도’였을 수도, ‘가까운 유학파끼리 농담으로 주고받은 일이 확대’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들을 주시하던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는 그들을 김정일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김일성과 김정일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며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결과) 1993년 2월 8일 유학파 출신 중 인민무력부 본부 성원들은 '반당, 반혁명종파분자'라며 처결된다.

“즉시 회의장 좌우 출입문으로 완전무장한 보위국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쏟아져 들어와 회의 참가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고, 그날에만 약 70~80여명의 고위급 군관들이 체포됐다.” (출처: 데일리안)

이후 1998년까지 무려 5년동안 군사유학생 출신의 80% 이상이 총살당하면서 북한 내 최초 군사쿠데타 모의는 막을 내렸다.

 

 

3. 6군단 사건

출처: 한국경제 / 위 사진은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배경) 6군단은 북한 국경지역인 청진에 사령부를 두고 함경북도를 관할하고 있었다. 95년 당시 특히 국경지역이었기 때문에 경제난으로 인한 체제 이완이 심화되었고 탈북자를 통해 외부정보도 많이 유입되었다.

그들은 국경지역의 이점을 이용하여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모은 달러를 사용하여 쿠데타 모의를 하게 된다.

쿠데타 모의는 6군단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예하 부대 대대급 지휘관까지 확산되었다. 여기에 함경북도 도당 책임비서, 행정일꾼, 국가안전보위부, 사회안전부(인민보안성) 부부장 이상 간부급이 대거 가담했다. 당시 함경북도 군, 당, 행정 책임자 대부분이 이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데일리NK)

 

과정) 당시 쿠데타를 모의했던 6군단 장교들이 모두 처형당해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탈북자로부터 두 가지 작전 계획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6군단이 직접 평양에 잠입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6군단 단독으로 평양을 장악하기는 힘들다는 판단 하에 한국군 및 미군을 나진항으로 끌어들여 후방 전 지역을 확보하고 6군단이 특공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들어가 지휘계통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데타 시행을 위해 달러를 버는 과정에서 과도한 달러 유통이 단서가 되어 인민보위국의 수사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6군단장이었지만 김일성과 친인척 관계에 있었기에 쿠데타 모의 사실을 모르고 있던 김영춘은 소식을 듣고 곧바로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결과) 6군단의 군 간부 40여 명은 처형당했고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친족뿐 아니라 사돈의 6촌까지 처벌했다고 알려진다.

반역의 대명사가 된 제6군단을 편제상에서 지우기 위해 제9군단으로 개명하였다.

 

의의) 1995년 북한 인민군 6군단 쿠데타 기도 사건은 결국 실패했지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북한 군부가 무조건 김정일 충성 일변도가 아니라는 점과 북한 내에서도 조건이 성숙되면 반체제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세 가지의 반체제 활동, 쿠데타 시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활동들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진위 여부에도 논란이 있습니다. 우리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북한의 소식통으로부터 이 사건들의 경위를 추적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더 구체적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사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한겨레,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 그 후…], 2015.09.0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288243.

2. 데일리안, '유학생 출신 군간부들 북 정권 무너뜨리려다...', 2013.05.21, http://www.dailian.co.kr/news/view/338246.

3. 데일리NK, '北'6군단 쿠데타모의사건' 아시나요?', 2005.01.21,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1337.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것 같았던 무서운 독재정권 하에서도 권력을 흔들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그러므로 현재의 김정은의 공포정치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회가 혼란스럽고 경제적인 고난이 크다면

언제든지 다시 북한은 흔들릴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급작스러운 북한 체제의 붕괴와 그로 인한 통일이 닥치더라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통일부대학생기자단 선정안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