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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김일성을 축출하라" 8월 종파 사건 ①


"수령", "유일자", "독재자", "반신(半神)"... 북한의 초대 주석인 김일성을 떠올리면 흔히 연상되는 단어들입니다. 김일성은 북한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김일성에 대한 이미지는 북한 전역을 휘어잡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의 권력이 지금처럼 공고해지기 이전에, 김일성의 일인 독재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북한의 유일지도체계는 북한 정부 수립 이후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김일성은 수많은 반대파와의 정쟁에서 승리하여, 그의 지도체계를 차근차근 세워나간 인물이었습니다.


김일성과 북한 내의 반 김일성 세력이 맞붙었던 가장 큰 사건이 1956년의 "8월종파사건"입니다. 8월종파사건은 북한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사람도 쉽게 접하기는 쉽지 않은 북한의 현대사입니다. 영화만큼 급박했던 8월종파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제거하다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공산주의 사상가이자 지도자였던 박헌영


해방 후 북한 지역에는 한반도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회주의권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하던 지역에 따라 연해주 및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했던 소련파, 중국 대륙에서 활동했던 연안파,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국내파, 간도 및 만주에서 활동했던 만주파 등 여러 계파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만주파의 수장이었습니다.


박헌영은 국내파 중에서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수장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한 명이 지도하는 유일지도체계가 아니라 여러 지도자가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집단지도체계를 따르고 있었는데, 박헌영은 김일성보다 더욱 북한의 지도자에 어울린다고 평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박헌영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에 대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사상가였고, 또한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리며 한반도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므로, 김일성이 소련의 힘을 등에 업지 않았다면 당연히 박헌영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계 지식인들은 김일성보다 12살이나 많고 경험도 많은 박헌영을 훨씬 숭배했는데,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이나 지침이 필요할 때 "박헌영 동지가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 또한 김일성과 박헌영이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1948년 4월 19일 남북 연석회의 예비회의장에서 김일성(왼쪽)과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오른쪽)


이 둘은 수시로 갈등을 빚었고, 김일성은 박헌영을 '이론가'라고 비꼬듯 불렀다고 합니다. 갈등은 특히 한국전쟁 휴전 이후 급격히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박헌영은 남침을 일으키면 남한 지역에 있는 사회주의 활동가 20만여 명이 함께 싸워주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빗나갔고,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무리하게 전력을 투입하여 전승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본인이 직접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해 남침을 감행했으므로, 소련과 중국이 전쟁에 승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을 경우 국가 수반직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엄청 큰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팽덕회(펑더화이)는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당신들의 관점은 틀렸다. 당신들은 전쟁을 요행(僥倖)으로만 보고 있다.”며 크게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급속하게 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박헌영과 김일성 간의 관계는 책임론을 사이에 두고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 해 11월 압록강 연안에 설치됐던 소련 임시 대사관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김일성은 "당신이 말한 빨치산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는가?"라며 소리쳤고,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병력을 왜 하나도 안두었는가? 그러니 후퇴할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다 내 책임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격분한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너도 책임이 있어!"라고 외치며 잉크병을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이는 김일성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했고, 그로 인해 북한 지도부에서 축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관련기사)


소련, 중국에게 남한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김일성과 박헌영이었지만, 결국 전쟁은 어느 한 편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전협정이 조인되었고, 누군가는 전승 실패의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불리한 점이 있었는데, 전쟁 이후 남한 지역에서 큰 봉기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박헌영은 북한이 남한을 침범하면 20만 명의 남로당 세력이 호응할 것이므로 3일만에 승리할 것이라 장담했으나, 실상 1948년부터 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2년 간 이승만 정부는 좌파 인사들에게 무차별한 백색 테러를 가해 남로당계는 사실상 몰락해 있었습니다.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빨치산 게릴라 작전을 펼칠 부대를 남파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습니다. 이에 박헌영의 '빨치산론'은 박헌영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박헌영의 정치 기반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 남로당계 문학가였던 임화


김일성은 정치공작을 통해 박헌영에게 '미제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라는 혐의를 씌웠고, 결국 박헌영은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이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됩니다. 그는 정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정전협정 이후에는 박헌영을 지지했던 남로당계 인사 대부분이 숙청을 당해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사실상 사망했습니다. 박헌영은 1948년 남북 정권 수립 이전 여러 미국계 인사들과 접촉했었는데, 이것이 그가 스파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55년 12월 "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를 죄목으로 사형과 전재산 몰수형을 받습니다. 박헌영은 이 자리에서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하라!"고 소리치며 안경을 바닥에 집어던지는 등 강하게 격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로당계 인사들은 즉각 처형한 반면, 박헌영은 바로 사형시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씌워진 혐의(정권 수립 이전 미국 인사들과 접촉한 것)는 간첩 행위를 증명할 만큼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했고, 박헌영 또한 강경하게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강요에 의한)자백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헌영은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매우 친밀했으므로, 김일성도 함부로 그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제거하게 되었고, 권력은 김일성이 독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북한 역사상 김일성을 겨냥했던 가장 큰 저항 사건의 계기가 됩니다.


("김일성을 축출하라" 8월 종파 사건 ②로 이어집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