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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독립운동현장을 찾아서

 지난 8월 9일 금요일, 제6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의 엠티가 있던 날,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아우내만세독립운동 기념공원을 방문했습니다. 아우내만세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독립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가 참여한 만세운동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이 자리는 일제의 옛 헌병주재소가 자리했던 곳입니다. 기념공원 안에는 아우내 장터에서 함께 했던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여러 가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특히 조각상들의 얼굴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염원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엄숙하고도 치열했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념공원 근처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 문을 연 이곳은 유관순 열사의 감옥생활일지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감시망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립만세를 외칠 때마다 일제순사에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념공원 인근에는 사적 제 230호인 유관순열사 생가지와 봉화지가 있습니다. 아우내 독립만세 기념비는 아우내 장터 뒷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1년생으로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켰고, 유관순 열사는 바로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와 교회와 학교들을 돌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안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조인원, 김구응 등의 마을 지도자들과 마음을 합하였고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협조를 받아 이 해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이자 유관순 열사는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정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해 나갔습니다. 이 만세운동에서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에 부모 두 명이 모두 피살당하고,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만세독립운동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잔인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문에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일제에 의해 유관순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이에 불복,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결국 유관순 열사는 옥중 항쟁을 계속하다가 1920년 19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렇게 유관순 열사와 독립투사들의 아우내만세독립운동을 기리고자 조성한 것이 바로 아우내만세독립운동 기념공원입니다. 그래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념공원과 함께 유관순 열사 생가 및 아우내 3.1 독립운동사적지 등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천안 병천에서 지난날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제 치하 당시 대한민국은 남과 북의 개념도 없었고 하나의 대한민국으로서 온 겨레가 힘을 합쳐 일제에 대항하고 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던 때였습니다. 비록 일제아래 주권이 상실되었지만 마음만큼은 남과 북이 모두 하나가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남과 북이 아픈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한 함께 고난의 역사를 헤쳐나갔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역사를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