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가 냉각되어 있는 지금, 남북이 하나였던 시대의 흔적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상하이(上海, 상해)는 중국의 경제 계획도시로 초고층 빌딩등과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있는 도시입니다.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신천지'라는 지역에 있는데 주위에는 고급 백화점과 쇼핑센터가 즐비해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임시정부 바로 맞은편에 화려한 백화점이 있어 우리의 임시정부가 조금 초라해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 열사들의 숭고한 뜻만은 더 빛나는 곳이기에 화려한 주변의 풍경보다 더 값진 장소입니다.
임시정부는 3·1 운동 이후 항일운동을 체계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노령·상하이·서울과 같이 다양한 지역에서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지만, 단일 정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1919년 9월에 상하이로 통합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임시약헌'을 제정하고 군사, 외교, 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침체를 겪게 되었고, 이 침체 기간동안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다시 임시정부의 항일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는듯 보였지만, 이러한 사건들 이후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쫓겨다니게 됩니다. 1945년까지 27년동안 충칭, 항저우, 자싱 등 다양한 지역을 떠돌아다니지만,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중경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광복군을 창설(1940)하여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당당히 연합군과 함께 투쟁하였습니다. 한편 광복 직전에는 미국의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협약을 맺고 국내진입 작전을 준비하는 등 광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 임시정부 입구(좌), 매표소 옆에 동영상 자료를 위해 마련된 장소(우)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 입구로 들어가면, 비석이 보입니다. 비석에는 '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 역사 깊은 장소입니다. 이 청사는 상해시 정부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등 한,중 양국의 협조로 이곳을 떠난 후 60년 만인 1993년 4월 13일 1차 복원하였고, 2001년 12월 건축물을 전면 보수하고 전시 시설을 확장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유적지로 단장하였습니다.'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60년 만에 복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임시정부'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더욱 일찍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내부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 김구 선생 집무실(좌), 부엌(중), 화장실(우)
▲ 전시장 내부
1층과 2층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을 비롯하여 많은 장소들이 사실적으로 복원되어 당시 임시정부의 구조를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윗층에는 전시장이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교과서에서 많이 보았던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불가피하게 이전했던 건물들의 모형도 잘 전시되어 있어 어떤 곳에서 독립의사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 독립공채
임시정부는 독립공채 발행을 통해 재정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임시정부가 국민들에게 얼마만큼 신뢰를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던 사료였습니다.
항일운동 시절 우리에게 남과 북이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 함께 노력하던 하나의 국가와 민족이었습니다. 같은 꿈을 가지고 노력하던 대한민국이 그립습니다. 다시 하나의 대한민국을 위해 하루 빨리 6자회담이 재개되길 바라면서 첫 기사를 마치겠습니다.
<취재에 동행해 준 친구와 함께>
장종찬(영남대학교)
'통일 미래 길잡이 > 현장과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중 탈북 고아 이야기 (1) 김윤태 교수 인터뷰 (0) | 2013.06.21 |
---|---|
탈북자 김숙희 씨의 탈북체험기, 그리고 남한 생활 (5) | 2013.06.20 |
북한이탈청소년과 함께하는 통일이야기 (0) | 2013.06.18 |
대학축제 속 북한인권 : 전북대 북한인권동아리 두드림 (2) | 2013.06.17 |
극장국가 북한의 국가성격 : 동국대 통일 아카데미 개최 (1) | 2013.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