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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탈북자 김숙희 씨의 탈북체험기, 그리고 남한 생활

  이번에 본 기자는 한 탈북민 김숙희 씨(가명)를 만나기 위해 용산역을 다녀왔습니다. 신상 정보를 일체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인터뷰를 진행했기에 이름도 가명으로 처리하였고, 사진도 첨부하지 못했으며 인터뷰 내용도 제한적으로 공개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현정 기자의 질문은 굵은 글씨)

김숙희 씨의 거주지 근처에 있는 용산역


안녕하세요, 김숙희 씨.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61년생으로 올해 53세이고요, 39살 때인 99년도에 탈북했습니다. 가족이 다함께 탈북했는데, 그 때 남편은 43세, 딸은 13세였습니다.


탈북 경위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저희 집안은 북한에서 굶주리던 집안은 아닙니다. 그러니 배가 고파서 나온 것은 아니고, 가장 큰 이유라면 억울함 때문일 것입니다. 저희 시아버지께서 국군포로셨는데, 남편 역시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똑똑한 사람이고, 공부에 열정도 대단했는데, 단지 국군포로 자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탄광에 배치받아 탄광 일만 하며 공부의 기회도 빼앗겨야 했지요. 이 모든 상황들이 억울했고, 그래서 자유를 찾아 탈북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탈북하실 때엔 어떻게 한국에 갈 지 계획을 갖고 나오셨나요? 

북한에 있을 당시 몰래 한국 방송을 들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우연히 북한은 국군포로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고, 당연히 국군포로의 자녀인 남편이 간다면 반가이 맞아줄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가서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할 생각이었지요. 연락만 하면 대사관에서 반가이 맞아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도착하여 대사관에 전화로 연락해 보니 대사관에서는 북한 국적이라고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군포로의 자녀인 남편은 차치하고서라도 국군포로인 시아버지조차도 말입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자녀라고 불이익 받은 것만도 서러운데, 한국 정부마저도 우리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화 통화 이후 대사관에 직접 찾아가 볼 엄두는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그럼, 탈북하신 이후에 어떻게 생활하신 건가요?

굉장한 고생을 했지요. 99년도 당시는 탈북에 대한 루트조차도 없던 때였습니다. 중국에 친척들이 있었기 때문에 친척들을 찾아갔지만 남의 집에 있는 것도 한두 달이어야 말이지요.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니라 가족 세 사람이 전부 말입니다. 게다가 당시엔 민가에 있는 것이 더 불안했습니다. 들키면 공개총살이니까요. 그래서 친척 집엔 약 1개월 정도 머물다 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농사 짓는 사람들이 지은 오두막에 있었는데, 참 피눈물나게 고생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머물다가 다롄으로 갔지요.

중국 지도. 원 안이 다롄의 위치.

 

당시 여권도 없으셨을 테고, 공민증도 없으셨을 텐데 다롄까진 어떻게 가신 건가요? 

기차를 타고 갔지요. 그 당시만 해도 탈북에 대한 루트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칸을 타면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셨군요. 그 후에 다롄에 가서는 좀 어떠셨나요?

탈북할 때 북한에서 돈을 얼마간 들고 나온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롄 가기 전에 그것을 다 써 버리고 다롄에 갈 때는 빈주먹이었어요. 배 타고 한국에 가기 위해 다롄엘 간 것이지만 웬걸, 부둣가에 그렇게 공안이 많은데 어떻게 배를 타고 갈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당시에는 브로커도 없었고요. 오죽했으면 타이어를 배에 감고 바다에 뛰어들어, 그렇게 한국으로 가자는 이야기까지 남편과 함께 했겠습니까.


저희는 편안히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데, 이 곳에 오기 위해 그렇게까지 애써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새삼 숙연해집니다. 그런데 당시에 브로커나 어떤 탈북 루트가 없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같은 탈북민을 만나 서로 의지하고 방법을 모색했더라면 되지 않았을까요?

웬걸요. 탈북민이 더 무섭습니다. 탈북민들은 생계가 어렵기 때문에 인신매매를 해서 돈을 벌려고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언제 한 번, 한 탈북민을 만났는데 자꾸만 남편을 따돌리고서 저와 딸을 따로 만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아, 딸과 나를 팔아넘겨서 돈을 벌려고 하는구나’라는 감이 왔습니다. 또, 이런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탈북민라는 본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탈북민을 가장한 보위원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 경우가 가장 무섭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탈북민끼리는 그래도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참 놀랍습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회가 가장 무서운 사회가 아닐까 싶은데요, 어찌 되었든 결국 한국에 오는 데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혹시 어떤 위기는 없으셨나요?

정말 큰일날 뻔한 일이 몇 번 있었지요. 특히나 저희 같은 경우는 생계형 탈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잡히면 처벌이 더 엄중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탈북한 경우에는 북한도 조금 사정을 봐주기는 해서, 노동단련대 같은 곳에서 몇 개월 고생하면 끝납니다. 하지만 저희는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의 탈북은 정치적인 이유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집안 식구들이 전부 직업이 좋았기 때문에 저희의 탈북이 북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컸고, 그래서 더더욱 저희는 들킬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저희가 들킨다면 그대로 관절 꺾어서 북송한 후, 북한에서 공개총살입니다. 실제로 공개총살하라는 명을 받은 보위부가 저희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한국에 온 이후에 들은 적도 있습니다.


관절을 꺾는다고요? 그런 소리는 생전 처음 듣습니다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왜 관절을 꺾는 거죠?

북송 중에도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절을 꺾어 버리면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세계적으로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북송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관절을 꺾음으로써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만들고, 부피를 줄여서 박스에 담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절을 꺾어서 사람을 넣으면, 큰 여행용 캐리어 같은 것에 많게는 세 사람까지도 들어갑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관절을 꺾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네요. 관절을 꺾으면 사람이 도대체 며칠이나 살 수 있나요? 그럼 북송 기간이 대체로 얼마나 걸리죠? 얼마나 오랫동안 관절이 꺾인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중국에 몇 개월 체류시키다 한꺼번에 북송시키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경우는 아마 관절을 꺾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탈북한 중범죄자는, 특히나 수배령까지 내려져서 보위부에게 직접 잡히게 될 경우엔 관절을 꺾어서 그 날로 북송입니다.

공개 총살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자면 우리 딸도 열세 살 때, 그러니까 탈북하던 해에 공개총살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요, 총살할 죄수는 이미 총살하기 전부터 80kg인 사람이 30kg이 될 때까지 갖은 고생을 시킨 후에 데리고 나옵니다. 이미 끌려나올 때부터 저항할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도 버둥거리지 말라고 관절을 다 꺾어서 끌고 나옵니다. 게다가 죽어가면서도 혹시나 당을 모욕하는 말을 할까 싶어 입에다 커다란 돌을 넣고 삽으로 쳐서 쑤셔 넣는데요, 그러면 이빨도 다 부스러집니다. 그 장면을 우리 딸이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어린 마음에 집에 돌아오는데 발이 다 떨리더라고 합니다.

북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공포정치입니다. 이런 공개총살이 있을 경우 다 구경오도록 하는데요, 이렇게 공포심을 조장해서 유지하는 체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잡혀서 끌려갔다면 똑같은 처지가 되어야 했겠지요.


참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중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위기가 있으셨나요?

먼저, 산에 있는 오두막에 있다가 다롄으로 떠나던 날 밤의 일입니다. 그 오두막에서 다른 탈북민 다섯 명과 함께 있었는데요, 그 날 저희가 같이 거주하던 탈북민 몇 사람과 사이도 안 좋고 해서 그 날 오전에 떠나왔고, 함께 거주하던 탈북민들은 저희 대신 다른 탈북민 둘을 더 데려왔는데요, 그 날 밤에 보위부가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결국 저희 대신 왔던 탈북민 둘은 참 운이 없게도 오두막에 온 당일로 붙잡힌 것이고요. 저희가 만약 하루만이라도 더 머물렀다면 그 둘의 운명이 바로 저희의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가 보위부가 들이닥치던 날 오전에 그 곳을 떠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그 후에도 몇 번 위기는 있었는데요, 다롄에 있을 당시 저희 남편은 매일같이 부둣가에 나가 한국으로 갈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성의 보위부가 우리가 한국에 가려고 다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롄까지 잡으러 왔다는 사실을 한국에 온 후에 아는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철렁한 일이지요. 정말로 들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런데 보위부가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짐작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룻밤 정도 만난 탈북민이 한 명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탈북민이라면서 자신이 탈북민임을 당당히 밝히고, 또 당당히 찬송도 부르고 다녔는데, 진짜 탈북민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마도 보위부의 접촉된, 탈북민들을 잡아가려고 탈북민 행세를 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한국 가기 위해 다롄에 간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보위부에서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단지 배가 고파서 탈북했다면 조금 참작이 되더라도, 한국에 가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중죄로 취급됩니다.


그런데 결국 한국까지 무사히 오셨지 않습니까? 당시엔 제대로 된 탈북 루트도 없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오게 되신 건가요?

정말 우연한 기회였지요. 다롄에서 한 선교사님이 꽃제비 아이들을 모아서 키우고 있었는데, 중국은 산아제한 때문에 한 집에 한 아이밖에 없어요. 그런데 선교사님이 꽃제비 아이들을 여럿 모아서 한 집에서 키우다 보니 결국 이웃의 의심을 사게 됐고, 공안이 그 집에 들이닥치면서 아이들이 전부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부둣가에서 남편과 만났던 아이인데요, 이후 선교사님이 다시 흩어진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그 아이가 선교사님을 데리고 저희 집까지 오신 겁니다.

그 후로 선교사님께서 한 달에 600위안 정도 하는 집까지 얻어주시고, 또 한 달에 약 1100위안 가량 하는 생활비까지 대 주셨어요. 한국에 올 때까지요. 선교사님을 만나기 전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고사리, 잣 등에서 불량품을 선별해내는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는데 말이지요. 입국 경비도 선교사님이 다 대주셨습니다. 그렇게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정말 오싹한 일은, 한국에 온 이후에도 북한에서 저희를 데려가려고 공작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가족들이 전부 직업이 좋았기 때문에 저희 가족의 탈북은 북한에서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지금은 친정 식구들도 전부 여기 있는데요, 친정 삼촌은 북한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정 삼촌이 지금 한국으로 오려고 중국에 있다면서, 중국으로 데리러 오라고 저희 남동생을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남동생이 중국에 갔는데, 오라고 했던 집 대문 앞까지 갔는데 왠지 모를 오싹한 느낌에 들어가진 못하고 선교사님께 연락해서 선교사님께 가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께서 인계받으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조선족이 중국 공안까지 전부 데려온 것입니다. 당시 선교사님은 미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보위부가 체포할 수 없어서 안전국 직원이 온 것이지요. 그렇게 저희 때문에 선교사님께서 붙잡히게 되셨습니다.


이미 한국에 와서 한국 주민등록증까지 받은 탈북민들마저 다시 포섭하려는 북한의 시도가 참 충격적입니다. 한국 생활은 좀 어떠신가요?

처음에는 그냥 마냥 좋았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체제가 싫어서 떠나왔으니까요. 어쩌면 저희에겐 한국은 북한보다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10년쯤 지나니 이 곳은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치열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 오늘 긴 시간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하셔서 나눠 주신 말씀들은 향후 우리사회나 탈북민들에게나 탈북민에게나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한 탈북민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셨는데, 이야기 속에는 저 역시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도 있었고,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 문제에 대한 해법은 역시 '그들도 우리도 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이, 지금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것을 누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너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차가운 시선보다는, 먼저 그 아픔에 공감하고, 또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대한민국에 오고싶어했다는 점을 생각하여 따뜻한 환영으로 맞아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현정 기자/백석대 신학, hyunjeong21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