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종식된 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중국과 같은 신흥 경제 강국의 등장, 제 3세계에서 벌어지는 국지전, 그리고 이른바 불량국가들의 도전 등으로 인해 세계를 다극체제로 분석하는 시각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국가간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좋건 싫건 미국과의 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스티븐 M. 월트는 이러한 현상을 사실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길들이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북한이 어떠한 방식으로 미국의 힘을 길들이는지에 대한 월트 교수의 분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 길들이기』의 저자 스티븐 M. 월트 교수 (출처 : http://www.hks.harvard.edu/var/ezp_site/storage/images/news-events/news/articles/what%E2%80%99s-killing-the-study-of-international-relations/1012504-1-eng-US/what%E2%80%99s-killing-the-study-of-international-relations_ksgarticlefeature.jpg)
중국의 부상으로 G2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우위는 상당히 확고하다. 특히 2003년 미국의 국방비는 전 세계 군비 지출의 40%정도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미군을 배치하고, 두 개 이상의 국가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하드파워의 우위는 경제적 우위에서 기인한다. 중국 경제가 미국을 따라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미국의 GDP는 2위인 중국의 두 배를 상회한다. 또한 이와 같은 미국의 경제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기술과 교육, 문화 등의 소프트파워의 영향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타임지가 선정한 2012-2013 세계 대학 순위. 20위권 내에 미국 대학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http://www.timeshighereducation.co.uk/world-university-rankings/2012-13/world-ranking)
위와 같이 객관적인 시각에서 미국의 힘이 압도적이라는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국가들이 미국을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미국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힘 때문일까? 월트는 다른 국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힘 그 자체가 아니라, 미국이 그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전 세계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들을 살펴보면, 2000년대 들어 미국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시 정권이 등장하면서 일어났던 9.11 테러와 그에 대응해서 나온 일방주의적 외교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미국과 아랍세계의 근본적인 갈등 역시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 때문이라는 점에서 미국이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 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은 획기적으로 변했다. (출처 : http://thejohnfox.com/wp-content/uploads/2012/09/The-space-of-911-Chris-Adrian1-249x300.jpg)
각 국가들은 미국의 힘을 길들이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을까? 월트는 타국들의 전략을 크게 저항전략과 순응전략으로 나눈다. 저항전략도 균형(Balancing) 전략, 망설임(Balking) 전략, 속박(Binding) 전략 등이 있는데, 월트는 북한을 공갈(Blackmail) 전략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국가로 분류한다. 약소국의 공갈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미국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2. 미국이 그들의 행동을 쉽게 막을 수 없어야 한다.
3. 요구 사항이 지나치게 많지 않아야 한다.
4. 양보하면 협박을 실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이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시작으로 이후에도 몇 차례 미국의 양보를 얻어냈다. 이렇게 그들의 핵 공갈 전략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첫째로 북한이 핵을 가지면 한국이나 일본 역시 핵무장을 감행할 가능성이 커진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미국이 심각하게 우려할만한 일이므로 미국은 북한에게 어떠한 행동이라도 취해야 했다.
둘째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의 의지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강력했다. 북한은 외부의 위협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그들의 핵무장 위협을 신빙성 있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 미국이 핵시설을 폭격할 경우 한반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었고, 그것이 엄청난 피해를 입힐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을 쉽게 제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제네바 합의가 제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도록 여러 장치를 심어놓았다. 검증 절차를 세분화해서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면 언제든 발각될 수 있도록 했고, 또 각종 의무 조항을 삽입하여 합의문을 준수하게끔 장치를 마련했다.
1994년의 1차 북핵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출처 :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0/0825/IE001229023_STD.jpg)
그러나 북한의 공갈전략은 2002년 촉발된 2차 북핵위기 이후부터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가 크게 변했을 뿐 아니라 미국은 이미 제네바 합의에서 실패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핵폐기 보다는 핵무기나 핵개발 기술이 다른 나라로 전파되지 않도록 하는 비확산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역시 더 이상 공갈전략이 유효하지 않음을 깨닫고, 조속히 대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로 나와야 할 것이다.
구희상
mejunate@nate.com
[참고자료]
스티븐 M. 월트, 김성훈 옮김, 『미국 길들이기』,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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