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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아프리카에서 만난 갈등과 통합 (2)]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이번에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를 통해 동아프리카의 갈등과 통합을 알아볼 것이다. 숭실대 탄자니아팀은 탄자니아의 관광, 국제회의 중심도시인 아루샤(Arusha)에서 동아프리카공동체 본부와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EAC본부(왼쪽)와 ICTR(오른쪽)의 전경(직접촬영)


르완다 대학살


  1994년에 일어난 르완다 대학살은 역사에 남을 반인륜적 범죄이자 ICTR 설립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르완다 대학살은 1994년 4월부터 약 100일 간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한 참극이었는데, 80~1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르완다 학살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 (출처 : http://www.occidentaldissent.com/wp-content/uploads/2012/02/hotel-rwanda-208x300.jpg)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1차 대전 이후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지배하면서 부터이다. 르완다의 민족은 후투족이 85%, 투치족이 15%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벨기에는 르완다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소수의 투치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편다. 보통은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더 큰 키와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대학살이 자행되던 당시에도 후투족과 투치족의 구별은 각 종족의 도장이 찍힌 신분증을 통해서 가능했을 정도다. 


(출처 : http://edu.glogster.com/media/4/24/15/34/24153476.jpg)


  이렇게 두 민족 간의 차별로 인한 갈등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그러다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게 되는데, 독립 초기에는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의 무력시위가 빈번했지만 후투족인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1990년에 우간다로 이주한 투치족들이 결성한 군사집단인 ‘르완다애국전선(RPF: Rwanda Patriotic Front)이 르완다를 침공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의 분노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94년 4월에 후투족인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당했는데, 이것이 투치족의 테러라는 소문이 돌면서 후투족의 분노가 대학살로 이어진다.


르완다 학살의 참상 (출처 : http://www.rnw.nl/data/files/imagecache/favolist-3/images/lead/RWA-genocide--wikim-rosereynolds.jpg)


  투치족에 대한 학살은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다. 아이들이나 여자 뿐 아니라 투치족을 옹호하는 후투족까지 학살의 대상이었다. UN평화유지군이 파견되긴 했으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국제사회는 그렇게 100만 명의 무고한 르완다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결국 1994년 7월에 투치족인 르완다애국전선(RPF)이 르완다를 점령하면서 학살은 종식되었다. 


ICTR설립


  르완다애국전선이 학살을 종식시키자 당시 RPF의 수장이었으며 현 르완다 대통령인 폴 카가메는 UN에 이 사건의 책임자들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한다. UN은 1994년 11월 8일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ICTR을 설립했고 탄자니아의 아루샤에 소재를 두었다. ICTR을 아루샤에 위치시킨 것은 르완다 내에 둘 경우 중립성 문제가 있을 수 있고, 탄자니아가 주변국들 중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적인데다 아루샤는 르완다와도 가깝기 때문이다. 


ICTR입구(직접촬영)


  현재 범죄자 92명 중 83명이 체포되었고, 나머지 9명은 수배 중이다. 기소된 범죄자들은 학살을 지시, 또는 직접 참여한 사람들 뿐 아니라 언론을 통해 투치족에 적대적인 여론을 조성한 언론사 간부나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표현한 노래를 부른 가수, 그리고 무기상들까지도 포함된다. 실제 학살은 주로 AK-47 소총과 마셰트칼로 자행되었다. 


ICTR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주신 Mr. Danford Mpumilwa(직접촬영)


  2차 대전이 끝난 후 최초로 도쿄와 뉘른베르크에 국제사법재판소가 설치되어 반인륜적 범죄를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냉전의 영향으로 인해 실제 전범 처리 과정이 흐지부지되었다. 이를 교훈 삼아 국제사회는 ICTR을 통해 반인륜적 범죄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ICTR의 판례는 다른 국제범죄들을 처벌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는데, 실제로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ICTR의 재판을 통해 처벌받았다. 이와 같은 국제범죄 처벌을 위한 노력과 근거들은 타 국가의 지도자들 또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를 경우 차후에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한다. 


ICTR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직접촬영)


  학살은 아니지만 한반도 또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미 겪었다. 그러나 남과 북은 여전히 분단된 채, 반세기를 넘게 서로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는 통일 이후에 남과 북의 이질감을 어떻게 줄이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지역 갈등의 문제는 더 이상 해당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ICTR의 사례는 국제사회와의 적극적인 공조를 통해서 한반도의 갈등을 봉합하고, 통일 이후에도 일어날 수 있는 남북한 국민들 간의 잠재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구희상

mejunate@nate.com



[참고자료]

『Think Global, Act Global: Learning from Tanzania』, 2013, 숭실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글로벌 현장학습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