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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우리는대학생기자단

[응답하라 상생기자단 (9)] 인터뷰이에서 인터뷰어로! : 박종찬 기자

통일부 상생기자단으로 활동하면서 얻게 되는 소중한 경험 중에 하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 입니다. 박종찬 기자는 상생기자단에 그러한 다양함을 더하는 기자 중에 한명이지요. 오늘은 박종찬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종찬 기자를 좀더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박종찬 기자와의 인터뷰 제목은 박종찬 기자의 바람에 따라 '인터뷰이에서 인터뷰어로'로 정했습니다. 무슨 뜻이냐구요? 박종찬 기자는 오늘의 인터뷰 대상이기도 하지만, 이제 한 매체의 정식 기자로서 인터뷰어로 활동해 나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떠나 실무를 접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조금씩 그려나갈 박종찬 기자이기에, 통일부 상생기자단의 활동은 박종찬 기자의 대학 시절 마지막 대외활동이 되겠지요. 통일에 대한 의지와 대학 시절의 마지막 추억을 동시에 담았던 통일부 상생기자단 활동이였기에, 오늘의 인터뷰는, 그렇기에 더욱 큰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1.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اَلسَّلامُ عَلَيْحْم, Hello, 你好, 今日は, 안녕하세요, 사랑이 넘쳐나고픈 남자입니다. 올해(2012) 인하대학교 기독학생연합에서 회장으로, 작년과 올해 인천시대학생공정무역연합 설립하여 회장으로 섬겼습니다. 한국어문학을 전공하며 문학 창작 학회 청하에서 시와 소설을 쓰고, 문화콘텐츠학을 부전공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대학에 발걸음을 줄여야 할 때가 왔지요.


2. 문학과 기독교와 관련된 활동을 주로 하셨네요. 통일에는 원래 관심이 있으셨던 것인가요? 통일부 상생기자단에 지원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2011년에 제가 활동하는 인하대 IVF에서 선교부장을 맡을 때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요청하여 학교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와 수용소 출신 탈북민 증언회를 어렵게 열었어요. 통일부 상생기자단 4기 기자였던 유소현 기자가 전시회를 보고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가졌던 것이 상생기자단과의 첫 만남이었어요(관련 기사: 충격적 실상 그대로 담아낸 <북한정치범수용소 전시회>). 그 뒤 유소현 기자의 소개로 2012년 2월 25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통일비전연구회 창립 세미나(관련 기사: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 통일비전연구회 창립세미나)에 참가했을 때 다른 4기 기자들인 권해모리 기자와 김보라 기자를 만났어요. 4기 기자들을 만나면서 점점 5기 상생기자단에 지원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혀갔습니다.


3. 아, 그런 계기로 통일부 상생기자단이 되셨군요. 그렇다면 좀더 이전의 이야기들이 궁금해 집니다. 북한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가졌으며,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알려주세요.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어렸을 적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모두 겪은 할머니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초등학생 때는 학교 뒤편에서 얼음 속에 갇힌(?) 대남 살포 전단(속칭 ‘삐라’)를 꺼내 교무실로 가져간 적도 있었고요. 김일성의 첫째 부인인 김정숙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해요. 방학 숙제였던 교육방송의 “탐구 생활”에서도 북한의 체제와 언어에 관한 내용이 빠지지 않았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북한과 통일에 대한 관심이 커갔어요. 고등학생 때 할머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경찰서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수상하기도 했답니다.

본격적으로 북한 인권과 통일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인 대학생이 되어서예요. <북한의 이해>를 수강하여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의 강의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았고, 군 생활을 하면서 북한을 더욱 생각하게 됐어요. 군 시절에 연락하던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전역 직후 선배가 활동하던 북한 관련 잡지에서 몇 달 동안 무급으로 일했어요. 동기 기자가 한동대학교에서 북한 인권 학회 세이지에서 활동하며 2011년 2월에 서울 인사동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복학 첫 학기에 전시회와 수용소 실태 증언회를 기획했어요.

지금은 직접 활동하여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기보다는 통일부 상생기자단 5기 기자가 되어 인터뷰어(interviewer)로서 다양한 현장과 운동가들, 탈북민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통일을 향한 뜨거운 마음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같은 마음으로 통일을 바라지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이신 분들, 진보 성향이신 분들의 입장을 두루 접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해요.



<인하대학교에서 개최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에서. 왼쪽 당시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현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오른쪽 당시 이본수 인하대 총장>


4. 인터뷰를 하며 이야기를 듣다보니, 통일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신것 같습니다. 다양한 활동을 하셨던 만큼 에피소드도 여럿 있을것 같은데요. 이제까지 활동하면서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전시 장소를 바꿔야 해서 200장이나 되는 포스터를 수정해야 했고, 리어카도 도난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변경된 장소인 도서관 로비의 유동인구가 더 많아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청소 노동자 아주머니들이 리어카를 찾아주시면서 그분들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전화위복이 되었죠.

전시회 기간 동안 홍보를 위해 일주일 넘게 북한 군복을 입고 학교 생활을 했었는데, 실제로 체구가 작은 북한 장병이 입던 군복(군모는 제작)이라 몸에 잘 맞지 않았고, 결국 바지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서 난감했던 적도 있어요.

행사를 준비하며 친구들과 IVF 공동체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뜨거운 감사를 느꼈어요. 수용소 실태 증언회에 참석했던 불교학생회장은 친한 후배가 되어 지금도 북한 인권과 통일 운동에 관해서 교류와 협력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2011년 5월 30일 월요일로 기억하는데, 전시회를 마치고 물품을 정리하다가 결국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그날 1년 동안 제 몸을 힘들게 했던 증상이 메니에르라는 희귀병 때문인 걸 알았죠. 지금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있어요. 어떤 인터뷰 때는 탈진까지 겹쳐 인터뷰이의 말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대화를 진행하기조차 어려웠죠. 그래서 인터뷰이를 난감하게 했던 적도 있었어요.


<취재하러 갔다가 행사를 도와주는 박종찬 기자>


5. 박종찬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이라기 보다는, 대학생으로서 역시 대학생이신 박종찬씨와 함꼐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인데요. 대학생으로서 우리가 통일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문제인데요, 일반 대학생들이 북한의 인권과 통일을 위해 실제로 어떠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대학생들은 모두 특별해요. 제가 취재를 다니며 알았던 것은, 대학생들이 학술·공연·미술·교육·캠페인·재정 후원·모금·봉사 등 다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학내에서 이런 활동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어요. 혹 어설프더라도, 대학생이니까 해볼 수 있는 도전이라고 봐요. 자체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함께 하거나 모금액·후원금을 보낼 단체나 기관을 알아볼 수도 있어요. 앞으로 기사에서 이러한 대학생들의 활동을 소개할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북한과 통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제 주변에도 분단 상태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자신의 앞길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학생이라면 주변과 세계를 돌아보는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분단된 국가에서 살아가고, 분단된 저편의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학생이라면, 북한 인권과 통일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위해 TV나 신문, 인터넷 등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에 올라오는 관련 방송이나 기사를 눈여겨보시고, 단체를 둘러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가장 권해드리는 방법은 활동가나 탈북민을 직접 만나보는 거예요. 직접 손과 발을 움직이는 분들, 삶과 죽음을 오갔던 분들을 만나면 절로 마음이 피어오르게 되거든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도 되고요.

그래도 여의치 않으신 분들은, 통일부 상생기자단에 지원하시면 됩니다!


6. 통일부 상생기자단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신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상생기자단으로 활동하면서 쓰신 기사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기사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사실 모든 기사들에 애착이 가요. 강연이나 인터뷰를 하면 꼭 녹음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문서화 한 다음, 글로 읽기에 적합하게 살리는 작업을 거치다보니,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어느 기사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죠. 행사 취재의 경우는 동영상 녹화를 하기도 하고요. 단순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현장성을 살리는 데에 주력하기 때문이에요. 또한 화면을 통해 독자를 현장에 옮겨놓으려면 기자의 존재는 잊혀야 한다고 생각해서 도입부에 인사말과 소개를 빼요. 누가 쓴 기사인지는 어차피 기사 하단에 전자 명함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글로써 독자들에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하면서 기사를 존댓말로 작성하고 있죠. 그래서 기사를 쓰고 나서도 다시 읽어보면서 여러 번 고쳐요.

굳이 꼽아보자면 북한의 인권 실상을 다룬 뮤지컬 《언틸 더 데이》 취재 기사(“그날이 오갔지요?” : 뮤지컬 《언틸 더 데이》 마지막 공연을 가다)와 희원 극단 인터뷰 기사(“그날은 옵니다” : 뮤지컬 《언틸 더 데이》 희원 극단 인터뷰)입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배우들의 북한과 통일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진심으로 공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간의 노력과 고충, 공연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어요.


<뮤지컬 《언틸 더 데이》 인터뷰 당시 사진. 왼쪽부터 양정윤 배우, 박찬미 기자, 박종찬 기자, 김희원 단장>


《언틸 더 데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일화가 있어요. 인터뷰를 할 때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미인이어서 제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연락처를 받을 때도 손을 떨면서 휴대전화기를 받았어요. 동행했던 박찬미 기자가 저더러 ‘사심 기자’라고 했었죠(웃음).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살아서 다시"라는 곡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7월에 있던 IVF 전국리더대회: 한반도평화포럼(추후 기사 참조)에 가려고 전철을 타고 있었는데, 구로에서 천안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북한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남자 주인공과 남한으로 온 여자 주인공이 서로를 그리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북한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주민 전체, 제 3국에서 떠도는 탈북민들, 전쟁과 탈북으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이산가족들을 향한 애절함으로 다가왔어요. 이 곡을 반복 재생한 채로 기사를 썼었죠.

얼마 전 12월 23일에 공연을 3번째 관람했는데, 대부분의 배우들과 스토리가 많이 바뀌어 개인적으로는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지난번 공연의 감동이 워낙 컸나 봐요.


7. 앞으로 남은 상생기자단 활동 기간 동안 어떠한 기사를 쓰실 계획인가요?

하핫, 밀린 기사 써야죠. 작성한 기사보다 밀린 기사가 훨씬 많아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기사 작성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제가 활동하는 영역들도 많아서 취재는 많이 다녔지만 정작 기사를 묵혀둔 것이 많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기사를 보실 때는 한겨울인데 기사에는 반팔 입은 사진이 올라와도 너그러이 용납해주시기를 부탁드릴게요.

앞으로 올라올 기사는 대부분 대학생이나 청년들의 활동상들일 거예요. 그리고 알고 있는 취재처가 많다 보니 아직 인터뷰를 못한 분들도 있고, 행사 소식이 들어오면 제가 가는 대신 다른 기자들에게 종종 알리곤 했어요. 아무도 취재를 가지 못한 행사 중에 아쉬운 행사가 꽤 많답니다.

새해에는 북한과 통일 관련 서적이나 영상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어요. 물론 밀린 기사들을 다 쓰고 나서요.

그리고 인천 지역의 통일 운동가들 모임에 초청을 받았는데, 이곳에서의 모임도 기대하고 있어요.


8. 마지막으로 블로그를 찾은 독자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

저는 대학 시절 후반부에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이 참여하는 북한 인권 운동과, 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참여하는 공정무역 운동에 뛰어들었어요. 양쪽을 통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두 운동 모두 사람들 살리는 일이었기에 동참한 것이었죠. 사람보다 이념이 우선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념이 사람을 위하지 않고 사람이 이념을 위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북한 주민 후원 《쌀의 노래》 콘서트에서. 왼쪽부터 IVF 간사이자 코드셋 밴드 김성한 리더, 코드셋 베이시스트이자 길 가는 밴드 장현호 리더, 박종찬 기자>


<인천대학교에 강연을 왔던 김성욱 한국자유연합 대표와>


앞서 자기소개를 할 때 오글거리게도(?) 사랑이 넘쳐나고 싶다고 했는데, 사랑이란 조건 없이 자신을 깎아내면서 사랑의 대상을 아끼는 것, 그래도 기쁜 것이라고 봐요.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몸을 담가오면서 무척이나 행복했어요. 여러분도 이 행복에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돼요. 자그마한 관심과 손길과 기도라도, 굶고 압제받는 이들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줄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여러분, 사……사……사랑합니다.



통일부 상생기자단으로 활동하는 학생들 모두, 누구 하나 진심이 아닌 기자분들이 없겠지만 박종찬 기자는 그 중에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기자입니다. 박종찬 기자와 저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기 회의에 매번 통일에 대한 메시지가 적혀져 있는 티셔츠를 입고 오는 박종찬 기자를 보면서, 박종찬 기자가 통일에 대해 가진 의지를 보았고, 통일에 대해 이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오늘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본 지금은 박종찬 기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잘 알게된 기분이네요 :)


북한 인권이라는 문제에 진심을 담은 안타까움을 가진 박종찬 기자를 보며, 더이상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고심하지 않아도 되는 통일의 날이 어서 도래하기를 바라봅니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