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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이산가족의 못다한 한마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렸을 적, 어머니가 "동네 슈퍼갔다가 오후 1시까지 돌아올게"라고 말하고 외출하신 기억이 있다. 
오후 1시가 지났지만 어머니는 집에 오시지 않았다. "엄마 어떻게 된 거 아니야?"란 두려움에 혼자서 부들부들 떨다가 오후 2시가 돼서야 돌아온 어머니를 붙잡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짧게나마 경험한 '이별'이었다. 하물며 사방에 미사일과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넋이 나갈 정도로 정신 없었을 때 생이별을 경험했던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이산가족'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분단이 될 줄 몰랐지. 이럴 줄 알았으면 헤어질 때 나눴던 그 한 마디라도 적어놨을 텐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지난 21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주세경(75) 할아버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주 할아버지는 14살 되던 해에 일어난 6ㆍ25 전쟁으로 인하여 북측에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두고 남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주 할아버지가 살던 곳은 38선 이남 지역인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읍항리다. 그는 가족들과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51년 "상황이 안정되면 돌아오자"며 아버지, 형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강화도를 거쳐 김포 비행장에 도착해 그곳에서 미군들 커피 끓이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52년 상황이 조금 안정되자 어머니를 모시러 다시 황해도 집으로 갔다. 그 와중에 중공군에게 붙잡히기도 했는데 휴전협상 중이라 금방 풀어줬다고 한다.

    당시 주 할아버지는 남은 가족들을 남쪽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을 모셔야 된다는 이유로 어머니께서 고향을 떠날 것을 거절, 다시 혈혈단신 혼자서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53년 7월 27일 휴전협상이 끝났고 남북한은 분단됐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 57년간 어머니와 여동생들 소식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주 할아버지는 휴전 후 인천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중퇴, 서울로 갔다. 한국은행에서 프린트하는 일을 하며 학업을 병행하여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입학했으며, 졸업하고 YMCA 등 여러 학원에서 불어 강사를 했다.

      박동광 기자와 주 할아버지

    주 할아버지는 2010년에도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신청했지만 그에게는 상봉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강화도 교동에 가면 내 고향이 항상 보여. 내 아버지는 북측에 놓고 온 가족들과의 상봉을 그토록 원하셨는데 3년 전 돌아가셨지. 1985년 최초로 남북간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했을 때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단 한 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라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말했다.

    또 “황해도에서 내려온 사람들 20여명과 매년 4차례 정기 모임을 갖는다”면서 “지인들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고 있어 안타깝다. 무엇보다 생사확인, 서신왕래 등의 기본적인 교류부터 빨리 진행되길 바란다"면서 “8만 여명 남은 이산가족들의 사라져가는 희망을 되찾아 달라”고 덧붙였다. 상봉의 희망보다는 체념부터 하는 주 할아버지의 모습은 우리네 대부분의 이산가족을 대변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산가족상봉문제는 남북한 정부가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다. 우리측 이산가족 통계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https://reunion.unikorea.go.kr)’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생존자는 2010년 5월 기준으로 8만 4,133명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행사를 통해 만나는 인원은 전체 인원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일례로 2009년 행사 때는 860명의 남북한 사람만(남한 528명, 북한 332명 - 이산가족 신청자 각각 100명 내외, 나머지는 신청자와 상봉하는 가족들)이 상봉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메인 화면


     결국 한국전쟁이 낳은 수많은 이산가족 중 실제 상봉 명단에 뽑히는 이들은 극소수이기에, 주 할아버지가 참여하는 '황해도 모임' 중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뽑힌 사람이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는 현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산가족상봉의 정례화 및 자유왕래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황해도 모임'을 비롯하여 아직까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이들 역시 상봉의 기회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우리 정부가 지난 26, 27일 적십자 회담을 통해 상봉 정례화와 생사 및 주소확인, 서신교환 등을 북측에 제안했지만 결국 무산돼 안타까움을 더한다. 하루빨리 이산가족들의 한(恨)이 정치, 경제를 넘어 남북간 도의적으로 해결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