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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테마시리즈:통일에 대한 준비] 첫번째 이야기

 

 

독일통일 20주년을 통해 바라본

통일에 대한 준비

 

 

올해 10월 3일, 개천절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된 날과 동시에 독일통일 20주년을 맞는 날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언젠가 통일을 맞이할 우리들에게 20년 전 먼저 통일된 독일에게 어떠한 점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이번 기사에서는 독일의 통일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한 우연한 사건에서 이루어졌다



 ▼ 이미지출처 - http://news.joins.com/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독과 서독 모두 예상하지 못한 한 사건으로 일어났습니다. 1989년 여름, 동독에서는 여행 자유화 같은 점진적 개혁의 요구로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구 동독 지도부는 이에 소련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 당시 소련도 자유화 물결로 인해서 동독을 지원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통해서 여행자유화정책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당시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이었던 귄터 샤보브스키(Schabow-ski)는 이 기자회견에서 ‘말실수’를 하게 됩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여행 자유화 정책이 ‘언제’부터 발효되는지 이탈리아의 한 외신기자가 묻자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지금부터 바로!”라고 답변하게 됩니다. 그곳에 있던 기자들은 이 발언을 동독과 서독의 국경개방으로 이해했고, 그 효력이 지금 바로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이 같은 뉴스를 접한 동독 사람들은 곧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게 됩니다. 서독으로 넘어가려는 동독 주민들의 기세에 밀려 동독의 국경수비대는 결국 베를린 장벽을 개방하게 됩니다. 이 당시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서독 총리는 "동독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장벽이 무너질 줄은 알지 못했다."라고 회고합니다. 하루아침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에 몰려들었지만 구체적인 통일 계획이 없던 서독에는 혼란만이 가중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0개월 후 독일은 통일되었다
 

 ▼ 이미지 출처 - http://ko.wikipedia.org/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많은 여론들은 준비되지 않은 급진적 통일을 지양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점진적 통일을 염두에 둔 통일국가 연합단계는 헬무트 콜 총리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서 실현되지 못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0개월 후인 1990년 10월 3일, 결국 ‘흡수통일’ 방식을 취한 급진적 통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의 이러한 정치적 계산은 맞아 떨어져 동독 주민들에게 콜 총리의 인기는 하늘 높이 올랐으며, 1990년 3월 이루어진 선거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의 진영은 승리합니다. 

 

독일의 급진적 통일 후 후유증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온 가장 큰 이유는 서독 주민들의 부(富)였습니다. 당시 동서독의 마르크화 교환 비율은 공식적으로 4:1, 암시장에서는 10:1이었지만, 곳곳에서 서독의 화폐인 도이치마르크를 얻기 위한 동독 주민들의 시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헬무트 콜 총리는 1990년 3월 선거를 의식하여 동독 마르크화와 서독 마르크화를 1:1로 바꿔주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그 해 7월 결국 1:1 화폐교환이 이루어졌고 하루아침에 동독 주민들이 갖고 있던 동독 마르크화는 10배 이득이 되었습니다. 이에 동독 주민들은 급속한 소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동독 소비자의 생산성은 서독의 30% 수준이었지만 임금이 서독 주민들의 80%수준으로 뛰었고, 이러한 생산성 대비 임금의 불균형으로 인해 많은 동독 기업이 쓰러졌습니다. 따라서 실업률 또한 급속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지출되는 실업비용, 복지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독일의 전체 통일비용 약 3000조원 가운데 1500조원 이상이 복지비용으로 지출 되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독일 주민들을 한 순간에 서독 주민들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던 정치적 약속의 부작용이었습니다. 이 후유증은 통일이 된 20년 후인 지금도 통일연대세 등으로 구 동독 지역에 매년 115조원을 지원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지금 독일의 경제적 후유증과 사회적 갈등을 보는 우리 국민들 중 일부는 남·북한 또한 통일 이후 이러한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통일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꼭 이루어질 통일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20년 전 독일의 통일을 보고, 미리 준비하여 후유증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독일의 통일 사례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을 몇 가지 제안한다면,

첫째, 한반도에서 이루어질 통일은 정치적 통일을 먼저 이룬 후 경제적 통일을 점진적으로 이루어야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과 같이 경제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정치적 이해관계에 우선하여 이루어지는 급진적 통일은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국가 연합단계와 같이 점진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이 되기 전 동서독은 산업구조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통일 이후 자동차, 기계, 제약 등 중복되는 산업이 많아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동독 기업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행히 이같이 겹치는 산업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있고, 북한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력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점진적으로 경제적 통일을 한다면 서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보완점이 되어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둘째, 독일은 한 순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서독으로 넘어오는 동독 주민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서독으로 넘어오는 많은 수의 동독 주민은, 헬무트 콜 전 총리가 급속한 통일을 선택한 또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합니다. 매일 약 3000명 정도의 동독 주민이 고향을 버리고 서독행을 택한 이유는 동독에서는 기대했던 것만큼 생활수준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상황을 피하려면, 통일이 된 이후 북한 주민들이 우리나라로 오지 않아도, 자신들의 고향에서도 충분히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북한에 대한 지원은 통일 이후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좋은 투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의 통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은 누가,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닥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장 내일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경제적, 사회적 모든 부분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 나중에 통일이 된 이후에 혼란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