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이산가족들의 수호천사, 대한 적십자사

 

 

 

이산 가족 상봉을 주관하는 기관이 어디일까요?

너무 쉬운 질문이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대한 적십자사'입니다. 줄여서 '한적'이라고도 부르지요.

 

 

대규모의 인원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 북측으로 넘어가게 되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수입니다.

이번 행사 역시 적십자사 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많은 봉사자들이 수고를 해주셨는데요.

저희 상생기자단도 상봉기간 동안 적십자사 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행사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 대한 적십자사 조끼를 입은 이다정 기자

 

 

그런데 대한적십자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구일까요?

이미 유명한 기구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인지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오늘은 이 '대한 적십자사'가 어떤 단체이며,

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의 행사를 지원하는 지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가요?

대한제국은 1903년 1월 8일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였고, 1905년 10월 27일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 규첵'을 제정, 반포함으로서 탄생하였지요.

일제강점기간이었던 1919년에도 대한 적십자사는

상하이의 임시정부 하에서 독립군과 제외 거주 동포들을 위한 인도적인 활동을 전개해오고

재해구호, 보건, 소년적십자, 부녀봉사사업 같은 체계를 갖춰

수재, 화재, 전재민, 영세민 구호, 응급구호원 양성 같은 큰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해방 이후 매우 열악했던 민생을 돕기 위해1948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적십자사를 국가 차원에서 설치할 입법 작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9년 4월 30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을 공포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지요. 

 

이러한 역사를 가진 대한적십자사는 적십자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주변의 이웃과

인류의 고통을 덜기 위해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혈액 사업도 하고 있으며, 구호활동도 하고 있지요.

이 구호 활동에는 물론 북한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바로 '남북 교류 활동'입니다.

남한에서 많은 물자들을 북한에 지원할 때 대부분 적십자를 통해서 지원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대한적십자사는 1971년 8월 12일 KBS방송을 통해 북한 적십자회(줄여서 '북적')에

인도적 차원의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의합니다. 

그리고 반세기 동안 남북으로 흩어져 가족과 친지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한맺힌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요.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는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되며,

이 성과에 힘입어 이산가족 문제와 면회소 설치 등을 협의하기 위해

수차례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였습니다. 대한 적십자사는 2009년 12월까지

총 17차례의 이산가족 대면상봉과 7차례의 화상상봉 행사를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열린 제5차 적십자 회담을 통해 우리측은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전담, 건설ㆍ운영하는데 합의하였는데요.

2007년 12월 7일 남북면회사무소를 준공하고 2008년 7월 12일자로 면회소 건물은 완공하였으나

금강산 관광 잠정중단으로 면회소는 개소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둘러싸고 남북이 이견을 보였던 부분이 '장소'문제 였던 것 기억하시나요?

지난 번 김의도 국장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면회소는 금강산 관광 중단 문제와 얽혀

상봉장소로 사용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두고 말이 오갔던 것이지요.

 

 

바로 이 건물이 면회소 건물의 모형인데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남측의 건물과 북측의 건물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다행이도 이번 상봉에서는 이 면회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숙소는 사용하지 못해 면회소와 떨어져 있는 금강산 호텔과 외금강 호텔을 이용하게 되어

많은 이산가족들은 상봉장과 숙소를 왔다갔다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상봉 행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적십자 소속 봉사자들은 이렇듯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이셨답니다.

이산가족들이 접수하는 것을 돕고 안내하는 역할은 물론, 도움이 필요한 곳엔 어디든지 달려갔습니다.

 

 

바로 윗 사진은 대한 적십자사의 유종하 총재와 북한 적십자회 최성익 부위원장의 사진입니다.

화기애애해 보이지요?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는 동안 두 분은 함께 테이블을 돌이산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남북한의 관계가 지금 사진 속 두 분의 모습처럼 정답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적십자 직원분들은 상봉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상봉장을 지켰습니다. 

저희 상생기자단도 그러한 적십자사 분들을 보며 감사함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적십자 옷을 입고 지원 일을 하는 동안 가장 슬펐던 일은

작별 상봉 때 북측 가족이 탄 버스와 남측 가족 사이를 갈라 놓는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탄 이산가족들과 그 밖에서 유리창 하나를 두고 매달려 있는 이산가족들은

"오빠, 오빠. 문 좀 열어봐!"

"아버지, 건강하세요."

"형, 꼭 다시 보자."

는 말을 외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저희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헤어져야만 하는

이산가족들의 슬픔에 비할 것이 못되겠지요.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눈물이 고입니다.

 

  

비록 이번 상봉 정례화 시도는 북측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인류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고, 고난이 있는 곳에 적십자가 있다'라는 적십자 표어 아래

한국 적십자사는 남측 이산가족들의 애끓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덜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