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말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위한 세력들을 모으고 있을 시기...
그의 아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고려의 충신이었던 정몽주에게 함께할 것을 요청하는 시를 전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거절의 시를 보낸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말 문신 겸 학자였던 정몽주.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그는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이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그에게 지지 세력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단심가'를 통해 거절하였다.
얼마 후 그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정몽주가 암살당한 장소인 선죽교는 태조 왕건이 919년에 송도(지금의 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는 8.35m, 너비는 3.36m이며 화강석을 사용, 널다리 형태로 지어졌다. 다리의 양쪽의 돌난간은 정조 4년(1780년)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설치하였다.
선죽교는 원래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렀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가 솟아 나왔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지금은 북한의 개성시에 위치해 있고, 국보 문화유물 제 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유물로 지정된 만큼 통행은 제한하고 있으며, 대신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선죽교 서쪽으로는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국보 128호)과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선죽교는 지금 중국 상하이 엑스포에서 북한의 전시관인 <조선관>에도
그 모형을 본떠 만든 다리가 전시 되어 있다.
정몽주의 이야기와 그 배경이 되는 개성의 선죽교. 아쉽게도 지금은 그 곳을 가볼 수 없다.
남북의 많은 문화유산들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탐방 기사를 올릴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그 날이 올 때까지, 이야기가 있는 북한의 문화유적에 대한 기사는 쭈욱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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