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워크샵 둘째 날>
DMZ 워크샵 둘째 날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우리 다함께 살펴볼까요?
<고석정>
지포리 버스 정류장에서 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라 때 진평왕이 세운 것으로, 석굴암벽에 시문(詩文)을 새겨 풍경을 예찬한 구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고려 충숙왕이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조선 명종 때에는 의적당의 두목 임꺽정이 고석정 건너편에 돌벽을 높이 쌓고 칩거하면서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했다고도 한다.
지금의 정자는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1년 철원 유지들이 재건한 것이다. 현재 뱃놀이·낚시터로 알려져 있으며, 부근 일대에 관광시설도 있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참조)
<평화전망대>
전망대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빠를 줄 알았던 모노레일은 굼벵이 기어가듯 올라갔다.
철원에서 보는 북녘 땅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60여년 인적이 끊긴 그 곳에서는 고라니 등의 야생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이곳은 자연 생태 보존 지역으로 가치가 클 것이다.
<월정리역>
한국 전쟁 때 멈춰버린 열차가 뼈대만 앙상한 채 남아있는 곳이다.
그때 그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분은 현재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한국 전쟁의 비극이 남겨져 있는 그곳,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그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노동당사>
1946년 이 곳이 북한 땅이었을 때 조선 노동당이 공산 독재 정권의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는 건물로
소련식 건축공법으로 지어졌으며 철근 없이 콘크리트로만 지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라는 구실로 마을(리)마다 백미 200가마씩을 거두었고,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건물의 내부 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만 동원했다고 한다.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공산 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는 금강산을 방문하는 국민 및 외국인들의 출입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출입 계획의 대북 통보, 출입경 심사, 휴대품과 반출입 물품 검사, 동·식물 검역,
출입과 관련된 민원업무처리 등을 담당한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 전 까지는 이곳을 거쳐야만 금강산으로 갈 수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 왕래가 있기도 한 곳이다.
<DMZ박물관>
DMZ 박물관 내 모습
부지 면적 14만5,396㎡, 건축 연면적 1만759㎡, 지상 3층의 규모로
DMZ와 관련된 역사와 문화 유적에 대한 기록이 집대성 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 전쟁의 흔적, 삐라 등이 전시되어있다.
또한 DMZ의 여러 생태의 현장을 전시해 두었다.
<고성 통일전망대>
▲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쪽
DMZ에는 통일전망대가 많다.
그렇지만 고성 통일 전망대는 금강산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 그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탈북대학생, 경원대학생, 상생기자단, 美 Wellesley college, Boston university 학생들은
북한 사회 실태에 대한 소개 및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 열심히 토론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
<경제>
<북한 경제 상황>
1) 1953년 ~ 1973년 경제 5개년 계획으로 인해 남한보다도 GDP가 우월했다.
2) 1988년부터 남북 경제 격차가 일어나기 시작, 1994년부터 김일성 사망, 김정일 집권 이후 선군정치 - 경제 하락, 1995~1999년 300만 이상의 주민이 아사하였다.
3) 1994년부터 탈북자가 늘어나기 시작. 탈북자가 많을 때는 한 개 마을이 통째로 탈북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정식 입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4)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5) 2009년 화폐 개혁을 통해 북한 정권이 시장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2010년 시장을 소극적으로 개방하기 시작.
경제적 변화 중 가장 피부로 와닿는 것은 바로 먹는 문제이다. 북한 주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부터 경제난으로 굶기 시작했다. '94년에는 밥을 먹었고 명절에는 떡을 먹었지만, '95년 초부터 죽을 먹기 시작, '95년 말부터는 하루 두 끼로 식사량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것이 96년부터는 풀을 먹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가 일명‘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시기다. 그 당시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한 사람들은 가난의 길로 들어섰고, 그나마 밀수 등을 하면서 편법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 유성혁- 경원대 기계정보
<연애>
길거리에서 스킨십을 할 수 없다. 손도 잡을 수 없고, 안을 수도 없다.
애정행각을 길거리에서 하고 다니면 주위 사람들이 천박하다고 생각한단다,
북한에서는 남녀에 기대하는 행동이 다르다.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남녀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남자는 세야 하고 여자는 현모양처여야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남한에 왔다가 개방적인 문화 및 북한과는 다른 남녀 역할에 충격을 받는다.
북한에는 중매 결혼이 많으며, 약혼식도 있다.
결혼식은 두 번 하는데 남자 쪽에서 한 번, 여자 쪽에서 한 번 한다.
박진희- 경원대 독어독문▶
<군대>
북한 군대는 선군 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복무 형태에 따라 8~13년동안 복무한다. 일반병은 8년~10년, 특수병은 13년까지 군 생활을 하며, 여군은 의무가 아니지만 지원을 한다.
참전에 대한 제도, 훈장이 법적으로 체계화 되어있지만, 실제로 혜택은 거의 없으며 군인들을 동원해서 건설, 농업 등의 일을 하는 일이 잦다. 군대 내에서의 식사는 열악한 편이며 육류 역시 부족해 군인의 100명 중 30~40명은 영양 실조로 전역한다. 여군의 경우에는 체지방이 줄고, 머리가 빠지는 등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후생 복리가 좋지 않은데 자대 배치는 거주지와 먼 쪽으로 배치되며 결정적으로 복무 기간동안 휴가가 없다. 또한 군대 내에서 아프거나 죽는 경우에도 가족에게 통보되지 않는다. 남북 관계에 장애물적인 존재, 호전적인 행동은 선군사상 기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무기를 수출해서 수입을 얻으며, 그 액수가 약 5억 불로 추산되나 이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광석- 경원대 중어중문
<인권 - 종교>
이미 전세계 인권단체에서 북한주민에 대한 인권 문제가 화두에 오를만큼 북한 인권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교육으로 인하여 3명이 모이면 1명이 스파이 활동을 한다고 볼만큼 서로에 대한 감시가 철두철미하다. 이는 종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이며 이러한 감시로 인하여 서로를 억압하고 의심한다.
왜 김일성, 김정일을 원망하지 않는지, 그들의 사상과 주체교육에 대하여 반문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우리와 달리 태어날때부터 그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했고, 인민과 조국을 위해 굶주림을 견디는 자세를 당연시 해온 북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반미주의 교육으로 인하여 현재 북한의 경제적 문제도 미국 때문에 배고프고 굶주린 것이라는 사고가 팽배하다.
김지훈- 경원대 독어독문▶
<북한이탈주민의 우리사회 정착을 위한 개선방안>
두 명의 학생이 북한이탈주민의 우리사회 정착을 위한 개선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아래는 이 내용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하나원을 거쳐서 남한 사회로 정착한다.
그리고 사회에 나올 때, 상담사와 담담 형사가 1:1로 담당하여 북한이탈주민의 올바른 정착을 돕는다.
그러나 이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남한 학생들 및 사람들의 관심이다.
-단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 1학년 박서영
우리는 북한과 우리가 같은 한 민족이기에 북한이탈주민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장 별 문제 없을 것 같은 언어만 봐도 북한에서 사용했던 언어나 단어들이 남한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외래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북한 말 특유의 억양으로 인하여 조선족으로 오해받고 사회 정착의 기본인 취업조차 어렵다.
사회화 과정에 대한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북한을 이탈하게 되면 정부에서 지원금이라는 형태의 현금이 주어져,우리 나라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사야 할 지 알지 못해서 혼란스럽다고 한다. 예를 들면 만원이라는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이건 제 가격이 맞는지 등)의 기준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남한에서의 생활은 우리에겐 당연한 삶이고 평범한 일상이지만, 북한과 기본 생활 자체가 다르기에 북한이탈주민은 오늘도 옳고 그름의 기준 없이 자신이 있던 곳과는 다른 삶에 적응하느라 어려워 하고 있다.
◀ 상생기자단 3기 최창열
그럼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언어 차이에 관한 문제는 북한의 말과 우리나라 말의 차이를 담고 이해를 돕기 위한 남북 공동 국어 사전 편찬 제작입니다. 이는 분단 후 남북한 사이의 언어 이질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다산콜센터 등에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한 상담 전문가를 두어 콜센터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현재 서울 다산콜센터 120은 많은 사람들이 활용하는 정보의 창고입니다. 여기에 북한이탈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직원을 고용한다면 그들의 생활 궁금증 및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리 상담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에서 학대받은 기억, 탈북 후의 트라우마 등으로 인해 심리적인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1:1로 접근하여 지속적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심리상담사가 이 역할을 한다면 북한이탈주민들의 남한사회 적응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총 3박 4일간의 DMZ 분단현장 체험기간. 이 기간동안 우리는 그 비극의 현장을 통해 ‘통일’의 당위성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녁 시간마다 가진 토론의 시간을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시간 및 북한이탈주민들의 처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경제는 1994년 이후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 되었습니다. 악화된 상황 속에서 막혀있는 정보, 계속되는 억압과 감시 속에서 많은 북한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탈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온 남한 사회, 그들이 처음 접했을 때 받는 충격은 적지 않았습니다. 돈 만원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어떤 메이커의 제품이 좋은 건지, 식기 도구는 어디서 사야하는지 등, 남한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관심’과 ‘이해’였습니다.
이들의 남한 사회 정착을 위한 대책 마련은 통일을 향한 움직임의 연장선입니다. 통일이 된다면 2천만 북한 동포들이 남한 사람들과 교류를 할텐데, 정책적 통합만으로는 많은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많은 북한 동포들은 우리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도록 연구하고 돕는 것이 훗날, 통일 이후의 남북한 국민 대통합을 위한 하나의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이날의 토론은 그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통일을 향한 움직임의 시작, 남한 사회에서부터 찾아봅시다!
'통일 미래 길잡이 > 현장과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외기자단의 자원봉사, 하나센터 동부 편 (0) | 2010.08.30 |
---|---|
통일의 염원은 임진각의 작은 연못에도.. (0) | 2010.08.28 |
미국 여대생들의 하나센터 자원봉사 활동 스케치 (0) | 2010.08.26 |
'빵집 아저씨'고재영씨가 말하는 통일 미래의 꿈 (0) | 2010.08.25 |
북한이탈주민 인터뷰를 통해 알아본 신앙생활 및 정착 (0) | 2010.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