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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국어 표기법의 역사"를 통해 바라본 통일

 

 

  현재 전 세계에는 약 6,000여 개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가 없는 민족은 없지만, '문자'가 없는 민족은 많습니다. 대부분이 고유의 문자를 갖지 못하고 다른민족의 문자를 빌려쓰고 있습니다. 혹은 한곳에서 기원한 문자를 주변의 여러 민족이 공유하면서 진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이라는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글은 남한과 북한의 가장 주요한 연결점이자 공통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과 관련해서는 이미 지난 기사 "북한말 본격 파헤치기!"에서 언급해드린 바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번에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우리가 어떤 표기법을 사용했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면서 본래 하나였던 한반도의 모습을 상기시켜보고자합니다.

 

 

 

  한자를 이용해 말하는 언어와 글로 쓰는 언어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물이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입니.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고자한 차자표기법의 원리는 음독의 원리, 석독의 원리 두가지가 있습니다.

   한자는 각각이 하나의 단어입니다. 즉 단어의 의미와 음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한자가 가진 의미와 상관없이 음만을 취하여 표기하는 것이 음독의 원리입니다. 예를 들면, '古'는 '옛'이란 의미와 '고'란 음을 가지는데 이 의미와는 관계없이 음만을 취하여 연결어미 '-고'를 표기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음과는 상관없이 한자의 의미만을 취하는 것이 석독의 원리입니다. 예를 들면, '水'는 '물'이란 의미와 '수'란 음을 가지는데, 이 한자를 쓰고 '물'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한자를 음으로만 읽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여전히 한자를 음으로 읽기도 하고 뜻으로 읽기도 합니다.

  고대 한국어에서는 이 두 가지 표기 방법이 공존하다가 중세 한국어 시기에 들어와서 석독의 전통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음독의 원리나 석독의 원리를 통해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 등의 고유 명사를 표기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이나 인명을 여러 방식으로 표기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면, 素那(或云 金川) 白城郡蛇山人也 (삼국사기, 권47)

소나(혹은 금천이라고도 한다)는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 땅 사람이다.

  이 예시에서 '素那'와 '金川'은 동일한 인명입니다. 이들의 새김과 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素                  那                   金                   川

새김 : 희다     새김 : 어찌     새김 : 쇠[소이]     새김 : 내[나이]

음 : 소              음 : 나              음 : 금              음 : 천

즉, 동일한 이름 '소나'를 한자로 표기함에 있어서

'素那'는 한자의 음만을 빌린 것이고, '金川'은 한자의 새김만을 빌린것입니다.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노력은 문장까지도 표기하려는 시도로 나아갔습니다. 이두(吏讀)는 그 일환으로 우리말과는 다른 한문을 변형하여, 한자를 우리말의 어순에 따라 배열했습니다. 또 중국어에 없는 조사아 어미 등의 문법 형태소를 한자를 빌려 표기하여 보충함으로써 한자를 통해 우리말 문장을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문법형태소'가 무엇일까요?

우선 '형태소'란 뜻을 가지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그중에서 문법적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소를 '문법형태소' 또는 '형식형태소'라고 합니다. 반대로 실질적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소를 '실질형태소'라 합니다. 예를 들어, '-었-'은 과거라는 문법적 개념을 나타내는 문법형태소 이고, '얼굴'은 눈, 코, 입이 있는 머리의 앞면이라는 의미를 지닌 실질 형태소입니다. 

  초기 이두의 예로는 552년 혹은 612년에 쓰인 신라의 임신서기석이나 591년의 경주 남산 신성비 등이 있습니다. 임신서기석의 경우 문장을 우리말 어순에 따라 적은 것이 눈에 띄지만 문법 형태소의 예는 특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경주 남산 신성비의 경우 여기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입니다.

辛亥年  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  如法作  後三年崩破者  罪事  敎令誓事之  (경주남산신성비, 591년)

신해년 2월 26일 남산 신성을 지을 제, 법대로 짓고 후에 3년 안에 붕파하면 죄 주실 일로 삼아 듣게 하시고 맹세하게 하였다. 

위의 예에서 '南山新城作 '과 같은 구절은 한문의 어순이 아니라 우리말 어순에 따라 '목적어-서술어'의 순서로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如法'과 같은 구절에서 '以'는 도구, 수단을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 '로'에 해당합니다.

 

  고려시대 이후 이두에서 조사와 어미의 표기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고, 특정 문법 형태소를 나타낼 때 쓰이는 한자가 일정하게 정해자는 등, 이두 특유의 형식이 고착화되었습니다. 교유명사 표기법이나 구결, 향찰 등과 달리 이두는 19세기 말까기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한문의 후광 덕분이기도 하고, 관리들 사이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그들만의 특수한 문어로 정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어와 달리 한국어는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는 형태소, 즉 조사, 어미, 접사가 발달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문을 읽을 때 그 내용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한문의 중간에 '토(吐)'를 탈아 읽는 방식이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문법적 요소를 '입겿, 입겾' 혹은 '구결(口訣)'이라고 합니다. 또한 구결은 이처럼 토를 달아 읽는 방식 전테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조사나 어미 등의 문법 형태소를 한자로 표기할 때에는 앞서 살펴본 음독과 석독의 원리를 이용하여 이들 문법형태소와 음이 같거나 뜻을 보여주는 한자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구결을 다는 데 사용되는 한자는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보조사 '은/는'을 표기하는 데에는 '은'이라는 음을 지닌 한자 '隱'이나 그것의 약체자를 사용했습니다.

  구결에는 '석독 구결'과 '음독 구결'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석독 구결은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는 것으로, 음독구결과는 달리 원문으로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쪽에도 구결 토가 달리고 '역독점'도 찍혀 있습니다. 이를 읽는 방식은 한문을 오른쪽에 달린 토를 이용하여 우리말로 해석하면서 읽어 내려가다가 역독점이 있는 부분을 만나면 위로 거슬러 올라가 왼쪽에 토가 달린 한자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음독 구결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듯이 한문을 그대로 읽으면서 조사나 어미만을 덧붙여 읽습니다.

 天地間萬物之中     唯人     最貴爲尼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동몽선습(童蒙先習)』)

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    취귀하니    소귀호인자    이기유오륜야

  석독 구결은 음독 구결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1970년대에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口訣)이 발간되면서 기존의 음독 구결과는 다른 방식의 구결도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석독 구결 자료가 여럿 발견되면서 석독 구결의 독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전기 중세 한국어, 고대 한국어의 실체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습니다.  

 

  신라의 향가를 표기한 방식을 '향찰([鄕札)'이라고 합니다. 이는 새로운 표기법이라기 보다는 앞서 살펴본 고유 명사 표기법과 이두를 종합, 확대한 것입니다. 향찰이 정착해서 일반화 된 것은 통일 신라 시기로 추측됩니다. 향찰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 부분(실질 형태소)은 석독 표기로, 문법적 요서(형식 형태소)는 음독 표기로 하는 것을 원리로 합니다.

  「서동요 」를 통해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                        해독                    해석

善花公主主            善花公主-님-           선화공주님

        他密         남 그스- 얼- 두-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                  薯童房-                 서동방을

卯乙抱       밤- 몰 안- 가-        밤에 몰래 안고 갔다

  위의 예에서 밑줄 친 글자들은 모두 조사, 어미 또는 접미사로 문법 형태소인데, 종결 어미인 '如(다: 여)'만 석독의 원리를 따른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한자의 음을 빌린, 음독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他, 密, 嫁, 置, 夜, 抱, 去'와 같은 실질 형태소들은 석독의 원리를 따랐습니다.

  향찰 방식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한국어를 만족스럽게 표기하지 못하였으므로, 고려 초기까지 쓰이다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이전에도 우리말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 고유의 '국어 표기법'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밑바탕이 되어 훗날 훈민정음과 같이 우수한 문자를 창조해내는 결과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날, 한반도는 한글의 우수성을 누리며 편리한 문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단의 현실로 인하여 현재 남북한의 문자사용에는 여러가지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통일이 된 후에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주요한 과제입니다. 때문에 이처럼 '국어표기법'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본래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같은 문자를 사용하며 살았던 '하나'의 한반도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상 양다혜 기자였습니다!

 


 * 참고 자료

『국어학개설, 이익섭, 2011, 학연사.

『한국어정서법, 이선웅·이승희·정희창, 2015, 사회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