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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분단 66년]2. 1960년대의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

 

 

 

<총 5부작 기획연재>


1950~ 1990년대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의 변화 그리고 함의


 

 

 


제 2부, 1960년대 북한정권의 정치, 경제노선 

 

 

 

중소 이념분쟁과 북한의 대응전략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창했던 '스탈린'이 죽은뒤 정권을 잡은 후르시초프는 '평화공존론(平和共存論)'을 주창했다. 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있다는 당론으로 스탈린에 비해 다소 온건한 사회주의 정책이었다.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 당시 소련의 국가주석이었던 후르시초프는 일국사회주의와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계급투쟁과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강조했던 중국 지도부의 입장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서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4월 중국 공산당 기관지 [홍기]는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였고 소련공산당은 중국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하였다.

 

 북한은 처음에는 중소분쟁(中蘇紛爭)에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 남한에 '반공'을 국시로 내걸은 강력한 반공군사 정권(1961. 5. 16)이 들어서자 자국의 안보이익을 고려하려 실리적 외교활동을 벌였는 데 1961년 7월 6일에는 북한이 공격 받을 경우 소련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조소우호협약을 맺었고 5일 뒤에는 중국과 상호협조와 원조에 관한 조중우호조약을 맺었다.

 

 

 

중소분쟁과 북한의 고립

 

 북한지도부는 반공 군사정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소련과 제일 먼저 공수동맹을 맺었으나 소련에서 진행되는 개인숭배 비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미투쟁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김일성에게 소련의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은 위험한 것이었다. 급기야 1962년 10월 쿠바사태가 일어나자 김일성은 미국에 굴복한 소련의 태도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1964년에는 혈맹(血盟) 중국과의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발단은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북월(北越)에 군사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서 시작됐다. 양국의 관계는 1966년 중국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격화 되었는데 중국이 김일성을 수정주의 독재자로 비난하면서 양국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변화된 국제환경과 남북관계는 북한 사회에 전쟁 유기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정치노선을 지지해주는 사상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니 내부적으로도 마찰이 일어났다.  김일성은 내부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국방건설에 정책을 최우선에 두고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

 

 

 

 

 

 

 

 

내부적인 혼란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청와대 습격

 

 

 내부적인 혼란을 수습하고 인민들의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이 내부적인 혼란이 외부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도 자국이 연이은 경기침체와 설상가상으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스러워지자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고자 만주를 침공했듯이 북한도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다. 1964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과 한국군의 파병은 북한을 더욱 긴장시켰다.

 

 북한은 난국을 타파하기 위한 일환으로 청와대 습격(1968)을 감행했다.  북한의 군부 강경파는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무장 공비를 남파하여 청와대 습격 작전을 기도하였다. 청와대 습격작전이 무위에 그치자 그 해말 11월에는 약 100명 규모의 무장공비를 삼척, 울진지역으로 침투시켰다. 1969년에는 동해안의 공해 상공에서 미군 해국 정찰기 격추하여 전쟁위기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공산주의 두 형제간의 다툼은 북한으로 하여금 체제변화를 모색하게 했다. 소련에서는 후르시초프가 등장하여 수정주의와 평화공존을 추구하고 설상가상으로 중국에서는 문화대학명이 일어나 김일성 일당 독재에 대한 비판이 일자 김일성은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국제정치적 상황이 북한 사회의 기본 틀이 된 자주노선과 주체사상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주체사상

 

 

1950년대 -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이 중심

 

1961년 제4차 노동당 대회 - 주체사상을 북한사회의 새로운 운영의 원리로 선언

 

1969년 - 김일성 주체사상을 노동당의 유일사상으로 규정했다. 이는 고전적인 막스 레닌주의가 크게 수정된 것을 의미하며 주체사상이 막스 레닌주의와 나란히 주창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 제5차 조선노동당 대회 -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선언

 

1972년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 - 주체사상을 3대 혁명운동을 제도화하여 사회이념으로 공식화

 

1974년 -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선포

 

1985년 - 주체사상의 이론적 방법이 마무리되어 주체사상이 확립이 된 시기.

               주체사상 확립을 계기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청산하고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천명

 

 

 







1960년대 북한의 경제노선


-제 7차 경제적 계획(1961~1967년)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화를 실현하고 경제의 모든 부문을 현대화하며 인민의 생활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사회주의 전면적 건설을 목표로 제 7차 경제적 계획을 시행했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원조 중단과 급증하는 군사비로 경제 계획을 차질을 빚었고 3년 연장 끝에 1970년에야 마무리 되었다.

 

-1962년에는 군사노선 채택

 

1960년대부터 한ㆍ미ㆍ일 안보체제가 구축되자 국제사회에서 고립위기에 놓인 북한은 국방건설을 위하여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채택, 군수공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1967년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 내 온건파 숙청

 

 

 국방비 비중이 국가재정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지고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쇠퇴하자 조국광복회 관련인사들이 주축이 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는 국방건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이들을 부르주아 수정주의 사상으로 규정 1967년에는 이들을 모조리 숙청시켰다. 김일성 1인 체제 기반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마치며

 

 1960년대 중소분쟁으로 약화된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두 거국(巨國)의 북한에 대한 비판은 북한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활로를 모색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일성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국방제일주의, 군사노선 채택, 청와대 습격 사건 등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사상적 기반으로 주체사상을 원리로 선언, 당의 지도이념으로 선언했다.  

 

 1970년대는 김일성 1인체제가 확립되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키우는 정치적 작업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3부에서 1970년대의 북한의 정치적 노선의 변화, 경제적 노선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하겠다.

 

 

 

 

상생기자단 4기 최영훈 기자

(justine127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