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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분단 66년]1. 1950년대의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좋은 방법은 역사를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3대 왕으로 지혜의 왕이라고 불렸던 솔로몬 왕은 "어리석은 사람은 체험을 통해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운다”며 역사를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우리 선조들은 과거의 경험들을 귀감삼아 현재를 이해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보는 통찰력을 지니기 위해 과거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동양역사의 시작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책은 주로 통감(通鑑)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한국과 같은 동양에서의 역사는 과거의 잘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의 선과 악을 구분해 주는 기록으로 이해되었다.  
 

 분단 66년 그동안 남북한 관계는 늘 갈등과 화해의 연속이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남침한 것을 시작으로 1.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1969), 8.15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1974),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1976),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 KAL기 폭파사건(1987)등 여러차례 도발을 감행했다.

 

 그런데 1990년대 갑자기 소련이 붕괴하고 동구권이 몰락하자 남북한 사이에도 화해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변화하는 듯 했다. 1991년 체결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협의서(이하 남북 기본합의서)〉는 '불가침'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내용을 담았던 합의서였다. 

 

 그러나 북한은 다시 그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1996)은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남북한간 냉기류는 1990년대 말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변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함께 선언한 「6ㆍ15 남북공동선언」은 "조만간 통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많은 기대감을 불러왔다. 한국 사람이 금강산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경기도 개성에 한국공장이 들어섰다. 심지어 백두산을 비행기를 타고 북한 항로를 이용해 직항으로 갈 수 있게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막혀있는 남북한 관계에 통일을 향한 상생의 길이 뚫리는 듯 했다. 적어도 뒤이은 제 2차 남북정상회담(2006)까지는. 

 

 우리의 기대감은 장밋빛 환상이었을까. 2008년 북한의 총격으로, 금강산 관광을 갔던 우리 국민이 피격되었으며 이 일로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단되었다. 또한 최근 발생한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도발은 남북관계를 다시 신냉전 관계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금강산 관광과 더불어 남북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마저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기로에 놓여 있다. 심지어 국지적 무력충돌을 넘어, 남북간 전면전 발발에 대한 우려까지 나온다. 남북관계가 과거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는 긴장과 대립의 도상에 서 있는 것이다.

 

  북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북한은 1950년 6. 25 전쟁을 치르며 김일성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하였다.  이후 그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에게 이르기까지 수 없이 정치, 경제적 노선을 바꿔왔다. 그들의 정치, 경제는 어떤 노선을 걸어왔고 어떤 방향으로 변모 되었는 가? 국제정치는 어떻게 그들을 변화 시켰는가? 앞으로 북한은 어떤행보를 이어 갈 것인가?
 

 북한, 그들의 과거를 알고, 현재 그리고 다가올 남북관계의 미래를 내다본다.

 

 

 

 

<총 5부작 기획연재>


1950~ 1990년대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의 변화 그리고 함의


 

 

제 1부, 1950년대 북한정권의 정치, 경제노선 

 


 

6ㆍ25 전쟁을 겪으며 김일성 1인 독재제체를 완성하다.

 

 김일성은 6ㆍ25전쟁을 겪으며 많은 정적들을 숙청(肅淸)했다. 1950년 10월에는 평양 함락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 김무정을 숙청하였고 1951년 말부터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을 하기 시작하여 종파분자이자 미(美) 제국주의의 스파이로서 쿠테타 음모를 시도했다는 혐의로 1952년 부수상 박헌영과 당비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가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소련파의 거물이었던 허가이는 김일성 독재에 반감을 가져 숙청위기에 놓이게 되자 1953년 자살하였고 6ㆍ25전쟁 직후 1955년에는 남로당의 지도자인 박헌영(朴憲永)이 사형을 당함으로써 북한내 한국의 토착 공산주의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중 1956년 8월 종파사건은 당 내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주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던 대숙청 사건이었다. 김일성은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건설 노선으로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집단 지도체제와 인문생활 향상을 위한 소비재공업의 발전이 우선해야 한다는 연안파(최창익, 박창옥), 소련파등은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의 1인 독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어 김일성은 소련파와 연안파를 대거 숙청하고 뒤이어 연안파 김두봉을 숙청함으로써 1인독재를 실현하였다.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고조되고 주체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 이 무렵으로써 대숙청은 소련의 영향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전후 복구사업과 사회주의 경제 건설

 -제 1차 3개년 계획(1954년~1956년)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김일성은 제 1차 3개년 계획(1954~ 1956)을 실시한다.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경제를 회복하면서 농업생산력을 집단적으로 조직하고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기위해 농업 협동화 운동이 시작했고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경제개발을 추구하였다. 당시 소련과 중국이 상당한 액수의 원조를 제공하였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1957~1961)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은 사회주의 공업화 기초를 마련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이 역시 농업과 공업 부문의 사회주의적 개조로부터 시작되었다(국영화, 집단화 추진). 1953년부터 58년 약 5년동안 북한 내의 모든 농지가 협동농장화 되었고 개인 상공업을 없애고 사유제 불인정 하는 사회주의 경영이 완료되었다.

 

 

1957년에는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내부의 소극성과 보수주의 기술에 대한 신비주의를 극복하고 주민들의 생산 노동참여를 경쟁시키는 집단적인 노동경쟁운동이었다. 1956년 12월에 조선노동장 중앙위원 전인회의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것으로 처음에는 생산 증대를 겨냥한 북한식 노동강화 운동으로 시작하였지만 점차 적용분야가 확대되어 사회주의적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사상개조 운동으로 변화하였다.

 

 

1958년에는 천리마 작업 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이를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당의 총노선으로 격상시켰다. 전개과정에서 공업, 농동, 건설, 운수, 교육, 과학, 문화 등 모든분야가 포함되어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하는 노동당의 총 노선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천리마 운동은 농업 상공업에도 적용되어 한동안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술개발의 저조와 주민의 생산의욕이 감퇴하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생산력이 저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대혁명운동(1958)

 

1958년에는 3대 혁명운동을 실시하였다. 한국 전쟁 직후부터 근로 대중의 낡은 관습과 의식을 씻어버리고 노동계급의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시킨다는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처음에는 3대 혁명 가운데 기술, 문화, 사상혁명을 강조하였다. 과학자 기술자 청년지식인 등으로 수십 명 단위의 소조를 마들어 공장이나 협동농장 등 생산현장에 직접 들어가 노동자와 농민을 돕거나 지도함으로써 북한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면서 사상혁명만을 강조하였다.

 

 

 

마치며

 

 1950년대 경제정책은 북한으로써는 성공적이었다. 1954년~60년 연평균 성장률 20% 내외의 고도성장, 중공업 우선정책으로 농업과 공업간의 불균형이 심화 되었으나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등의 분야에서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되어 1950년대 남한에서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 고개를 숙이고 평화 통일론이 대두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중공업의 비중이 70%나 되었다.

 

 

 

 

 

 

상생기자단 4기 최영훈 기자

(justine127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