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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안중근의사 서거 105주기, 남과 북,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안녕하십니까. 통일부 제 7기 대학생 기자단 이태호입니다. 창밖으로 봄의 푸르른 색감이 물씬 느껴지는 그런 날씨가 되었습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이런 느낌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올해인 2015년은 한반도가 오랜 투쟁 끝에 일본으로부터 광복을 쟁취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또한 지난 3월 26일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장렬하게 처단했던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지 105주기가 되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텐데요. 그만큼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항일운동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105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가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손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최근 연속해서 중국 뤼순 지역의 안중근 의사 매장 추정 지역 반경으로 '지표투과레이더(Ground Penetrating Radar)' 탐사 작업을 중국 측에 요청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 양측의 입장과 향후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해 저와 함께 알아보도록 하시죠.

 

▲ 뤼순 감옥 수감 중 안중근 의사 면회 사진 (출처:네이버캐스트)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1909년 10월 26일 9시 30여분 경, 중국의 하얼빈 기차역에서 세 발의 총성소리가 들립니다. 현장에서는 한 노인이 총탄을 맞아 쓰러져 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남자가 러시아군에게 포박당한 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라고 힘껏 외치고 있습니다. 쓰러진 노인은 당시 일본 정부의 고위 각료이자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의 중심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총탄을 발사한 사람은 바로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바로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려순에 위치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고, 이후 여섯 차례에 걸친 일방적인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게 되지만 별다른 공소를 하지 않으며 감옥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집필에 힘씁니다. 그러던 중 그는 결국 1910년 3월 26일 려순 감옥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하얼빈 역에서 체포되고 난 후 정확하게 5개월이 지난날이었습니다.

 

▲ 왼쪽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가묘 (출처:중앙일보)

" 내가 죽은 뒤에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안중근 의사 유언 중-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효창공원에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부터 순서대로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묘입니다. 1946년 김구 선생의 주도로 조성된 이 곳, 유해가 없이 봉분으로만 조성된 가묘가 하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묘입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 후 일본은 그 유해를 일자형 소나무 관에 넣어 매장합니다. 그의 묫자리가 이후 항일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가족들에게 유해를 돌려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매장 위치를 외부에 철저히 비밀로 부칩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뤼순 감옥의 모든 문서들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매장 위치에 대한 마지막 실마리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은 어떻게든 그의 유해를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해보지만 이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언젠가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대하며 효창공원에 그의 가묘를 세우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이 곳의 비석에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갖가지 외교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 러시아, 일본 측에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여러 차례에 걸친 남북한 실무접촉과 남북공동조사단의 뤼순 현지 조사가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며, 2008년에는 뤼순 감옥 북쪽에 위치한 야산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묻었다는 당시 일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우리 정부가 단독으로 현지에서 1개월 가량동안 유해 발굴을 시도했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안중근 의사의 묘를 참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이 매장지로 지목한 위치 주변에는 아파트가 자리해 있어 발굴 작업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현재 뤼순 감옥 주변 지역은 점점 시가지화되고 있으며 20층 이상의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 안중근 의사 매장 추정지 (출처:서울신문)

 

 지난 2014년, 우리 정부는 중국측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해 뤼순 감옥 주변 공동묘지에 대한 '지표 투과 레이더 탐지(GPR)'를 중국에 요청했습니다. 지표 투과 레이더 탐지란, 지하로 투과되는 반복적인 전자기파를 이용하여 지표면으로 반사되어 돌아오는 방출에너지를 받아 해석하는 지표지구물리탐사법의 일종으로서, 토양층 내의 소규모의 이상대 또는 매설물의 탐지 등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즉, 현재로서는 매장된 유해를 찾는 발굴작업에 있어 가장 효과적이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국 측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공식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뤼순항을 끼고 있는 이 일대는 중국의 군사보호지역 중 하나로서 쉽게 타국에게 개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둘째, "광복이 되면 시신을 고국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긴 안중근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므로, 남한만의 단독적인 발굴이 아닌 북한과의 합의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남북이 공동으로 정식 합의하여 요청해야만 고려해보겠다는 의사표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요. 다행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979년에 엄길선 감독의 지휘 아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북한 내부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구국투쟁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측은 안중근 의사 유해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어 지금까지는 협의가 쉽지 않았습니다. 

 

▲ 뤼순감옥박물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서거 105주기 추모식 (출처:국제뉴스)

 

 지난 3월 26일, 뤼순감옥박물관에서는 안중근 의사 서거 105주기를 추도하는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의원이 이곳을 방문해 추도사를 하였는데요. 이외에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 군포문화재단 등에서 추모식 행사가 열렸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 70주년, 그리고 안중근 의사 서거 105주기를 맞아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남북한 협의 하의 공동 유해발굴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한 다음날인 27일 새누리당 이군현 사무총장은 국회 상임위 간사단 회의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유해 발굴에 대해 남북한 모두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제대로 된 협의만 이루어진다면 공동 발굴 작업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언처럼, 김구 선생이 그의 가묘를 세우며 염원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언젠가 그의 유해가 자랑스러운 해방 조국의 땅에 편히 잠들 수 있는 그 날 역시 기대해 봅니다. 이상 통일부 제 7기 대학생 기자단 이태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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