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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 여성의 인권은 지금

 

 

 

북한이탈주민 2만명 시대,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온 북한이탈주민 중 남녀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요? 언뜻 생각하기에 험난하고 고된 탈북여정인만큼 남자가 많을 것 같은데요. 탈북자 넷 중에 셋은 여성이라고 합니다. 2000년까지 50%도 못 미쳤던 여성 북한이탈주민의 비율은, 2007~2009년에는 평균 77%를 넘은 상태인데요. 이를 실감케 하듯 지난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개소식에 참석했을 때도 여성 북한이탈주민이 눈에 띄게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녀 비율이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순 있겠지만 이처럼 압도적으로 여성의 비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성 북한이탈주민이 우리나라에 오기 전 실제 북한에선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원인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 경제난 이후 북한 여성의 지위 변화 ]

1987년 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북한 경제도 더불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경제성장률은 1990년 -3.7%를 시작으로 1992년 -6.0%를 기록하면서 계속해서 마이너스를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은 1993년쯤 식량 배급 체계가 붕괴되었는데요. 북한주민들은 기근과 영양실조, 질병에 허덕였으며, 심지어 아사자(굶어 죽은 사람)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가장 심하게 노출된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어린이와 노인, 여성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생존의 위협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주부에 대한 배급 할당량은 하루 300g으로, 그 양을 쉽게 표현하자면 고구마 한 개 정도의 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부에 대한 배급 할당량은 눈에 띄게 적었는데, 정규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한 수준이자 유치원 아동과 같은 양이었습니다.

 

 

 

위의 표를 보면, 주부가 초등학생보다 적은 양의 배급을 받는 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주부들의 영양실조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나머지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먹지 않거나 줄임으로써 영양실조를 비롯, 건강이 약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성이 자신의 음식을 세대주인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양보하는 것은 북한 사회내에 남아있는 전통적인 성별 태도를 보여주는데요. 이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가정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가정의 가장인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식생활에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노동부담의 증대

북한은 여성에게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맞는 부덕을 지닌 현모양처의 역할과 함께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혁명가적인 역할을 동시에 요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성은 가사 전담과 함께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여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경제가 나빠지면서 문을 닫는 기업소나 공장들이 발생하자 경제력을 상실하는 남성들이 증가하였는데요. 이러한 남성들을 가리켜 일은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다는 뜻의 '멍멍이', '자물쇠', '낮전등' 등의 속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일자리를 잃거나 직장에 나가면서도 봉급을 받아오지 못한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가사는 여성의 몫'이라는 가부장적인 사고로 인해 여성의 허리는 계속해서 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에 나가는 등 여성들에게 힘든 노동의 요구는 점점 증가하였습니다.

 

 「북한 식량난과 북한 인권」 발췌

 

 

또한 북한 여성의 가사 노동 부담은 전력난으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수돗물 공급이 원할하지 않아 물은 직접 길어 날라야 했으며, 고층 아파트의 경우 승강기가 작동하지 않아 높은 층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날라야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는 여성의 경제적 역할을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북한 여성들의 고단한 삶은 '달리는 여맹, 앉아있는 당, 서 있는 사로청'이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앉아있는 당'이란 이거해라, 저거해라 호통치면서 시키기만 하는 당을 빗댄 말이며 또한 '여맹'으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길 닦기, 마을 청소, 수혜 복구 등까지 동원되며 낮에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는 여성을 빗대어 '달리는 여맹'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남북한 여성 생활문화 비교 연구」발췌

 

 

 

 

이러한 이유로 이중, 삼중으로 겪는 고통으로 인해 탈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바로 우리사회에 찾아온 북한이탈주민 여성입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유치원생보다도 못한 식량을 배급받고,

실제 가정을 운용하는 데는, 가장보다 더 가장다운 역할을 어깨에 메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사 분담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그녀들은 얼마나 많은 날을 아프고, 굶주리며 살아왔을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로 왔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실업난으로 허덕이는 우리 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 여성에게 내주는 자리라고는

고작해야 일용직이나 식당 서빙 등 힘든 노동과 관련된 일들 뿐이었습니다.

 

힘든 여정을 겪고 온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환하게 웃는 그 날이 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