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조류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새를 찾아 산과 들을 쏘다녔습니다. 아들은 자연스레 조류학에 흥미를 느끼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했습니다. 훗날 아들은 한 나라의 조류학계의 선구자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훌륭한 조류학자로 거듭난 아들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들 역시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산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父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자 부자가 한 평생을 바쳤던 공통 주제, 새가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일까요. 남녘의 아들이 날린 새가 신기하게도 북녘의 아버지에게 날아가 아들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부자는 헤어진 순간 이후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새가 물어다 준 서로의 안부에 위안을 삼으며 남은 평생을 보냈을 것입니다.민족의 비극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일화의 주인공은 바로 원홍구(父)-원병오(子)부자입니다.
▲ 아버지 원홍구 박사▲ 아들 원병오 박사
6·25발발로 헤어지게 된 원홍구-원병오 부자지간
아버지 원홍구는 경기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평남 안주공립농업학교 교사, 함남 영생여고 교장과 평남 덕천공립농업학교 교장을 거쳐 1947년 김일성종합대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한 북한 조류학의 초석을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들 원병오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원산농업대를 졸업했으며, 일본 홋카이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 교수가 된 남한의 훌륭한 조류학자입니다.
▲ 1955년 조류보호와 생태에 대해 김일성에게 설명하는 원홍구 박사
부자(父子)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헤어졌습니다. 원홍구 박사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북한에 남았지만 세 아들은 남한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이후 원홍구-원병오 부자의 서로에 대한 소식은 슬프게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둘도 생각해내지 못한 둘을 이어주는 '새'라는 끈은 있었죠.
북방 찌르레기에 날려보낸 아들의 가락지와 안부
1963년, 아들 원병오 교수는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에서 '북방 찌르레기'라는 철새에 가락지를 끼워 날려 보냅니다. 표지 가락지는 당시엔 국산이 없어서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새에게 가락지를 끼운 건 철새의 이동경로를 알아내기 위함이었죠. 북방 찌르레기의 새끼는 초여름에 태어나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 어미 새들과 함께 남하했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북상해 옵니다.
그런데 63년에 가락지를 달아준 이 새는 남쪽에서 겨울을 난 뒤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서 2년간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 평양 만수대에서 당시 북한 생물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아버지 원홍구 박사가 이 새를 발견하게 되죠. 이 새는 일본에서 서식하지도 않고, 이동할 때에도 일본 땅을 거치지 않는데 새의 가락지에 '농림성(農林省)JAPAN C7655'라고 쓰여 있어 원 소장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지역본부에 문의를 합니다. 확인 결과 가락지는 서울에 있는 아들 원병오 박사가 달아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전쟁 때 아버지와 함께 북한에 남게 된 원 박사의 어머니는 철새 다리에서 떼어낸 아들의 가락지를 어루만지며 흐느꼈다고 전해집니다. 더 슬픈 것은 생사는 겨우 알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살아서는 단 한통의 서신도 주고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 한번 아주 간접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은 있었는데, 이는 편지형식의 북한 선전 유인물을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유인물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글이 실려 있었는데 어린 아들과 같이 새 잡던 이야기, 노모에 대한 이야기 등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원병오 박사는 비록 그것이 북한 체제 선전 유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아버지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나마 부성애를 전하고픈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읽어낸 아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참 아프게 합니다.
1970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은 원홍구 박사
아버지는 1970년10월 3일, 세상을 떠날 때 조차 꿈에도 잊지 못하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또 아들 원병오 박사는 일본학자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절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한편 남북의 부자 조류학자가 15년 만에 새를 통해 생사를 확인했다는 소식은 이념을 떠나 세계를 감동시키며 당시 소련의 프라우다, 북한의 노동신문을 거쳐 미국과 일본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또한 이 실화를 토대로 1992년에는 일본과 북한이 합작하여 만든 '버드(Bird)'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최초의 남북합작 단편만화영화 '새'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부모의 묘소와 상봉한 아들, 원병오 박사
서로가 너무나도 원했지만 당시의 남북관계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한 가족상봉은 원홍구 박사와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남북 간의 교류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인 지난 2002년 6월, 당시 73세의 나이였던 원병오 박사가 부모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방북길에 오른 것이죠.
원 박사의 방북은 같은 해 4월, 독일의회대표단의 방북 때 통역을 담당한 한국외대 독일어과 홀머 브로흘로스 교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부모 묘소 참배와 남북한 학술교류를 희망한다는 내용이 담긴 그의 편지를 전달하면서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원 박사는 14박 15일의 방북 기간 동안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어 있는 부모님을 만나 뵙고, 남은 친척을 만나며, 고향인 개성을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원 박사는 방북과정에서 "북한의 대학에서도 강의하고 남북한 학술교류에 기여하고 싶다"면서 "새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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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묘소를 찾은 원병오 박사
2014년 현재, 원 박사의 나이는 85세 입니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그의 연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선 그는 남북한 조류 자료를 집대성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한에서는 구할 수 없는 북한의 자료까지 모두 망라한 한국 조류학계의 매우 가치 있는 작업입니다. 또한 그는 조류 남북공동연구라는 목표 달성을 위하여 모든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이에 원 박사는 아버지와 자신이 이룬 조류연구결과의 남북교류 및 통합을 위하여 북한 연구원들과 과학협정을 맺은 바 있습니다. 원 박사는 북한농업대학 교수가 되고픈 꿈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그 결실인 연구물이 남북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9월 8일, 추석을 맞아 임진각 망배단에서 이산가족들이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와 자녀의 강녕을 기원하는 망향제가 열렸습니다. 새의 하늘에는 없는 분단이 아직까지 한반도의 하늘에는 지금껏 존재한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픕니다. 가수 부활이 남북통일을 주제로 하여 만든 곡인 '새벽'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는 오늘도 어제와 같은 꿈에 너와 머물겠지. 언젠가 꿈속에 서로 만나듯이 저 바람을 타며 새가 날아가듯. 저 바다를 넘어 기찻길을 따라 새가 날아오르는 하늘을 보라. 커다란 날개를 펴고 가까이 가려해. 우리가 살아온 날보다 내일이 더 길테니.'
한반도의 하늘이 새의 하늘처럼 되는 그 날까지, 가사처럼 새가 날아가듯이 우리도 커다란 날개를 펴고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분단된 날보다 더 길 통일된 내일을 꿈꾸면서요. 지금까지 서민지 기자였습니다!
최초의 남북합작 단편만화 '새'를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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