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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前 회장, 그는 왜 소 1001마리를 데리고 북한으로 갔었나?

정주영 남북관계

 현대그룹을 만든 故 정주영 현대회장(이하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기업가일 것 입니다. 그는 남북관계개선에 있어 큰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TV조선 <강적들>에서 다뤘던 에피소드 중 3월 12일에 방송한 내용을 토대로 여러분께 정주영 회장과 남북교류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정말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남북이산가족상봉이 지난 2월, 3년 4개월 만에 이루어졌는데, 이에 관련되어 떠오르는 사람은 아마 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일 것 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라보자면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수출주도경제에서도 큰 활약을 하고 민간남북교류의 선구자이자 88올림픽 유치에도 큰 공헌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서도 "정주영은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이었다고 표현을 했고 홍콩 이코노믹 리뷰에서는 아시아의 10대 인물로도 선정이 되었습니다.

정주영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달콤한 열매는 맺는다

 지금이야 현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이지만, 사실 정주영 회장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는 1915년생으로 강원도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30년 그는 송전소학교를 졸업하고 4번의 가출을 시도한 끝에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그가 4번을 가출한 이유는 바로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일해 봐야 콩죽밖에 먹지 못하는 그 팔자가 싫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네 번에 걸쳐 가출시도를 하고 마지막엔 완전한 가출을 성공하고 인천 연안부두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34년, 19살이 되던 해 그는 쌀가게인 복흥상회에 배달부로 취직하게 됩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는 달리 일이 끝나도 놀지 않고 장부를 정리하는 등 매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쌀가게 아주머니는 '여자에 빠져서 놀고 마시는 내 아들한테 물려줘봐야 이 가게는 망할 것'이라며 가장 성실한 직원인 정주영에게 물려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은 가게를 인수해서 "경일상회"라고 간판을 바꿔 달고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후 1940년에는 아도서비스('애프터 서비스'의 일본식 표현)를 인수해서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1946년 4월에는 지금 현대의 모체인 현대 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서 1년 만에 직원이 80명까지 증가하는 초고속 성장속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듬해엔 현대 토건사를 설립하여 건설업에 진출하게 됩니다. 1950년에는 현대건설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71년에는 현대를 그룹체제로 전환하고 이때부터 현대그룹의 회장을 지내다가 2001년 3월 21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마지막 꿈, 한반도의 통일 그리고 소 1001마리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정주영 회장의 고향 강원도는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구 아산리입니다. 즉, 정주영 회장은 실향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정주영 회장은 통일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고, 그의 마지막 꿈도 한반도의 통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 여생을 통일을 위해 바쳤다고 할 정도로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크게 힘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98년 6월 1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방북 하여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던 그 모습입니다. 그는 한 마리라도 더 낳게 하려고 500마리 중에서도 임신한 소를 많이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2차 방문인 10월에는 501마리의 소를 끌고 갔었습니다. 이 소들은 충남 서산 간척지에 조성된 70만평의 농장에서 키운 3000여 마리의 소 중 일부로, 정주영 회장이 92년부터 키웠다고 합니다. 아마 언젠가는 그 소를 끌고 북한에 방문할 생각을 하고 키우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정주영 정주영 소

1차 방문 때 500마리와 2차 방문 때 501마리, 총 1001마리의 소에는 정주영 회장만의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가 살던 북한 땅 강원도에서 가출을 시도할 때, 그는 소 판 돈 70원을 훔쳐서 가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금인 소 한 마리에다가 이자 천 마리를 합쳐서 1001마리의 소로 빚을 갚았다고 합니다. 북한방문 당시, 그는 "이번 방문이 단지 한 개인의 북한 방문이 아니라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라고도 했었습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신화를 써내려간 정주영 회장 

 정주영 회장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 위원장)의 첫 만남은 정주영 회장의 1차 방문 당시가 아니라 2차 방문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을 예고도 없이 찾아가서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방문한 데는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일단 정주영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아버지뻘인 나이인데다가, 당시 정주영 회장은 거동이 약간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머무는 영빈관에 직접 찾아가서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을 깍듯하게 예우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보통 최고지도자를 중앙에 세우지만 사진을 찍을 때도 가운데 자리를 양보하였고, "공산당 당수와 사진 찍으면 보안법에 안 걸리나?"라며 가벼운 농담도 던졌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의 북한 방문 이후 북한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모든 대북사업을 현대그룹이 독점하라고 했고, "석유가 생산이 된다면 남한에 주겠다"라는 말을 했으며 심지어 "북측은 미군의 남측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 미군이 계속 남아서 북과 남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한다"라는 발언도 했습니다.

  정주영 김정일

또 베일에 둘러싸였다고 생각되었던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고민 상담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고민은 그가 인민들에게 밟히는 꿈을 꾼다며 자신이 현지지도를 가면 인민들이 손을 흔들고, 장군님 오셨다고 환호를 하지만 과연 저 사람들이 실제로 나를 그렇게 반길까라고 의심하고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아버지 같은 정주영 회장에게는 보여줬던 것 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변하였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방송멘트가 전부 다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김일성', '김정일'이라고 호칭하다가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처럼 이름 뒤에 직함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정주영 회장을 우린 첫 사랑

여기서 잠깐 방북 당시 정주영 회장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익치 前현대증권회장이 자주 말했던 이야기인데 사실 금강산 사업추진의 가장 큰 이유가 정주영 회장의 어릴 적 첫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그 소녀는 고향인 북한 통천의 이장 집 딸로, 유일하게 마을에서 신문을 볼 수 있는 집이 이장 집뿐이라 신문을 보러 가는 핑계로 이장 딸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김정일 위원장은 샅샅이 뒤져서 그녀를 찾아오라고 합니다. 결국 그녀의 행방은 찾았지만 이미 2년 전에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주영정주영

이를 알게 된 정주영 회장은 "내가 2년만 일찍 알았다면 현대 아산병원에 입원을 시켜서라도 살려냈을 텐데..."라고 했다고 합니다. 첫사랑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그리웠던 고향을 찾아 조부 묘도 방문하고 작은 어머니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붉어진 눈시울과 함께 그는 "참 좋았습니다. 고향에 내려가면 그냥 동네... 우리 또래 친구들, 어른들이나... 우리 동네에선 서울 간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볼 수 없어서 지금은 참 안타깝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록 정주영 회장이 통일을 염원하는 이유가 지극히 개인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 자체는 북한을 전공하는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명언 중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뒤떨어져 있는 분야라고 주저 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고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은 패배주의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은 통일로 인해 우리들이 힘들어지고 못살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이 해 왔듯이 앞으로도 통일을 준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성공적인 통일한반도가 미래에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정주영 정주영

 

                                    
◈ 참고자료 및 사진출처: TV조선, <강적들>, 2014.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