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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남북, 과연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일까요?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 알려진 대한민국과 북한. 분단 된지 반세기를 훌쩍 넘긴 두 나라는 70여 년의 세월 동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해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념으로 인해 나라가 분단된 대표적인 4개 국가 중 베트남과 독일 그리고 예멘은 통일을 성취했지만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반도의 남과 북만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한반도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분단된 국가들이 몇몇 남아있습니다. 어떠한 나라들이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NO.1 민족 차이로 인한 분단-키프로스 공화국과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

터키공화국▲ 북키프로스와 남키프로스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섬나라 '키프로스'. 이 나라가 분단국가란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키프로스 또한 한반도와 같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데 지금부터 키프로스의 분단 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 제국,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은 키프로스 섬에는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였습니다. 독립과 그리스에로의 통합을 두고 반목하던 두 민족은 영국의 중재 하에 취리히&런던 협정을 맺고 1960년 독립하는데 동의를 합니다. 1963년 두 민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터키와 그리스는 배후에서 개입하며 키프로스에서의 갈등을 부추깁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키프로스에는 국제연합(UN)에 의해 키프로스 국제연합군(UNICYP)이 파견됩니다.


레드라 거리▲니코시아 중심부에 위치한 분단의 상징 레드라 거리(Ledra Street)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키프로스 섬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1967년 쿠데타 이후 6년간 그리스를 철권 통치한 파파도풀로스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전복된 이후 들어선 이지키스 정권은 자국 내 반대파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키프로스를 그리스에 병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1974년 7월 13일 그리스군은 키프로스 쿠데타에 개입해 친(親)그리스주의자인 니코스 삼손을 대통령에 앉혔습니다. 터키는 즉각 취리히-런던 협정에 의거해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했고 일주일 뒤 터키군은 키프로스에 상륙해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전 국토의 37%에 달하는 북부 지방을 점령하고 점령지 내 그리스인들을 추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남부의 터키계 주민 5만 명과 북부의 그리스계 주민 17만 명은 삶의 터전을 잃고 수천 명의 키프로스 주민들이 실종되었습니다. 이후 1983년 북부 점령지의 터키계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은 오로지 터키로부터만 승인받은 채 외교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에는 EU에 가입하였고 2008년부터 유로화를 도입하며 키프로스 섬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키프로스 섬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만이 유일한 합법정부이나 남부와 북부의 왕래는 제한적이고 민족 구성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키프로스 섬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NO.2 종교로 인한 분단-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령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거리에 그려진 IRA 페인팅

 

 아일랜드 섬에 위치한 아일랜드 공화국의 영토가 아일랜드 섬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아일랜드 섬의 5/6가량을 영토로 삼고 있으며 1/6에 해당하는 북부의 '얼스터'지방에는 영연방 소속의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러한 아일랜드섬의 분단은 종교적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아일랜드 섬의 대부분 주민들은 5세기 성 패트릭의 선교 활동 이후 대부분 카톨릭 교를 신봉해왔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잉글랜드의 헨리8세의 아일랜드 정복 이후 수세기에 걸쳐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과 성공회교도들이 북부 얼스터 지방에 정착하면서 아일랜드 섬의 종교 갈등이 시작됩니다. 

영국에서 이주해온 신교도들은 아일랜드 섬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주도권을 쥐고 기득권 행세를 하였으며 구교도인 아일랜드인들은 이들로부터 심하게 억압받고 차별당하며 살았습니다. 구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인들은 결국 영국 정부를 향해 부활절 봉기(1916년)와 IRA(아일랜드공화국군) 결성을 통해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합니다. 결국 영국-아일랜드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영국은 '영-아 일랜드 조약'을 통해 1921년 아일랜드 섬 32개주 중 26개주를 포함하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독립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북부의 나머지 6개 주는 영연방에 편입됩니다. 영국 정부가 신교도가 많은 얼스터 지방이 아일랜드 자유국에 포함될 경우, 구교도들의 보복성 공격으로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의 2/3을 차지하는 구교도들은 영국이 이러한 결정에 크게 반발하여 IRA를 통해 무장투쟁을 전개합니다. 1972년까지 존재하던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영국군과 IRA의 투쟁이 1970년대 초반 격화되면서 해산되었고 북아일랜드는 더욱 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무력 충돌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국지적 충돌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999년 주민 투표에 의해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부활하였고 2005년, IRA가 공식적으로 무장 투쟁 중지를 선언하면서 북아일랜드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IRA의 일부 과격파는 무력 행위를 지속하고자 하였고 북아일랜드로 인해 수십 년간 치안 불안에 시달린 영국 정부는 마침내 아일랜드 합병 여부 주민 투표를 승인하였습니다. 이 주민투표는 2016년 실시될 예정이며 만약 북아일랜드 주민의 과반수이상이 합병에 찬성한다면 아일랜드 섬은 거의 한 세기만에 통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NO.3 이념 차이로 인한 분단-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타이완 섬▲ 타이완 섬(중화민국) 지도

'양안관계'. 전 세계를 주름잡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과 과거 동아시아 경제 기적의 주역이었던 대만의 관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쩌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으로 나뉘어졌을까요? 

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었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긴 했지만 훨씬 강대한 국민당 정부의 지휘 아래 국공합작의 기치를 걸고 함께 항일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였던 장개석은 중국공산당을 견제하며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공합작도 결렬되고 맙니다. 뒤이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국공내전이 발발합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우수한 무기와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는 국민당이 손쉽게 승리할 것으로 점쳐졌지만 부패하고 무능한 국민당의 지휘체계로 인해 중국공산당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점령지 주민들에게도 민심을 잃으며 점점 궁지에 몰립니다. 

결국 1949년 장개석은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타이완 섬으로 50만 국민당 군과 함께 패주하고 모택동은 그 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합니다.

 

주서해 외교부장   ▲UN 총회에서 중화민국의 UN 탈퇴를 선언한 주서해 외교부장 양안 장관급 회담▲분단 65년만에 처음으로 개최된 양안 장관급 회담

 

비록 국공내전에서 패하며 타이완 섬으로 건너갔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냉전이 심화되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맞선 극동아시아의 반공전선 구축이 미국의 최대 관심사가 되면서 중화민국은 서방 세계의 지지를 등에 업고 UN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국제적 위상을 확보합니다. 

또한 장개석과 국민당의 독재 아래 중화민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듭하며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냉전이 완화되기 시작했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중화민국은 종전의 국제적 지위를 상실하고 1971년 스스로 UN을 탈퇴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견지하며 쌍방 수교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후 중화민국은 우방국들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수교국들에게 단교당하며 국제적 고립이 심화됩니다. 

반면에 중화인민공화국은 1972년 UN 상임이사국으로 국제사회 복귀, 1979년 미국과 수교를 거치며 국제 사회에서 중국 대륙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았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며 시장을 개방해 연10%이상 의 성장률을 보이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양안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고 서로 '하나의 중국'정책을 견지하고 있지만 중화민국은 자주적인 정부와 헌법을 가지고 있고 중국이 내정에 관여하지 못하므로 중국은 두 개의 다른 나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안의 통일은 분단이래 두 나라 초미의 관심사였고 최근 들어 경제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및 협력이 증대되며 양안 관계는 과거와 다르게 상당히 우호적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공동경비구역▲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공동경비구역

            

  키프로스와 아일랜드 그리고 중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직 세계 곳곳에는 분단국가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남과 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는 아닙니다. 대신에 '세계 유일의 특성을 가지는' 분단국가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종교와 민족 구성의 차이로 인해 내전을 겪거나 분단되는 사례는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념 대립으로 인해 분단된 곳은 현재 세계에서 한반도가 거의 유일합니다. 물론 양안 또한 이념 대립으로 분단되었지만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는 양안관계보다 복잡하고 남북한의 관계 정상화는 아직 멀기만 합니다. 판문점이 베를린 장벽처럼 분단 시절의 유산으로 여겨지는, 휴전선이 철거되어 남북한 주민이 남북을 자연스레 왕래하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최대한 가까운 미래에 남북한 주민이 함께 어울리며 통일의 기쁨을 흠뻑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7기 최대규 기자였습니다. 


[사진출처 : 1, 2, 3, 4, 5,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