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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통일을 넘어 평화로 - CCC 통일봉사단 간사진 인터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이하 “CCC” / 대표 박성민 목사)에는 CCC 통일봉사단(이하 "CCC 통일봉사단" 또는 통일봉사단또는 통봉단” / 단장 박성민 목사)이 있어 대학생들에게 통일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통봉단을 담당하는 이명근 간사님(이하 ”)과 강계승 간사님(이하 ”)CCC 부암동 센터 근처 순카페에서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주로 2010년 통봉단을 재정립할 때부터 노력해온 이명근 간사님과 진행하였습니다.

  

CCC 통일봉사단 로고(사진 제공: CCC)

 

Q: 자기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 저는 이명근 간사라고 합니다. CCC에서 2005년에 간사 훈련을 받고, 같은 해 하반기부터 정식 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북삼성 지역[각주:1]에 자비량 선교사로 1년 동안 갔다 왔었고, 그 뒤로 이 방면으로 일을 하다가 2010년부터 통일봉사단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담 간사가 되었어요. 통봉단에서는 20104월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만 4년이 되었네요.

: 저는 강계승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간사 훈련을 받고 작년 11월부터 통일봉사단에서 이 간사님과 활동하고 있습니다.

 

Q: CCC 통일봉사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 통일봉사단 자체는 1995년도에 시작했어요. 그전에도 다양한 운동이 있었고요. GCOWE 95라는 대회가 있었는데, 그중 하루를 SM2000이라는 이름으로 잠실주경기장에서 모였습니다. 그때 CCC뿐 아니라 교회들과 대학 선교 단체 등 8만 명이 모여서, 21세기에 청년들을 일깨워야 한다는 목적으로 기독교통일봉사단과 세계선교단을 선언했어요.

북한으로 보내기 전의 젖염소를 쓰다듬는 前 한국 CCC 총재 故 김준곤 목사(사진 제공: CCC)

 1994년도에 김일성 전 주석이 사망을 했죠. 그러다 보니까 곧 통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청년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북한은 어느 정도 체제적인 안정성을 확보를 해 갔어요. 그래서 당장 문이 열리면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이 안 열리니까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1999년도부터 시작한 젖염소 보내기였어요. 이 부분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2000년에 CCC 통일봉사단이 기독교통일봉사단 내의 조직으로 발대식을 합니다. 2000년에서 2004년까지 5년 동안은 매 CCC 여름 수련회에 신입생과 새로 참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통봉단 입단식을 했었어요. CCC 회원은 통일봉사단원으로 자연히 가입하도록 했죠. 2004년까지 발대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부터 동북 지역에서도 활동하고 젖염소도 보내기도 해 왔는데, 10년이 지났는데도 북한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동안 다음 세대를 잃어가고 있으니까, 그 세대들에게 통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고, 비전도 심고,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2010년부터 전담 간사를 세워 다시금 실제적인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그때부터 4년이 흘러서 현재 통일봉사단 모습을 갖게 된 거죠.

 

CCC 통일봉사단의 이명근 간사 

Q: CCC 통일봉사단은 최근 4년 간 어떤 활동을 했나요?

: 처음 통봉단은 통일이 되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휴학 또는 휴직을 하고 북한에 가서 돕는다는 목표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20년이 걸려 안정을 찾은 독일 통일의 모습을 보더라도, 당장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과연 능사일까, 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어차피 노동력은 거기도 많잖아요. 단순히 일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백두산 폭발이나 홍수 같은 급격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하다면 일시적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독일보다 오래 걸릴 듯한 남북 통일 과정 가운데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청년·학생들이 통일에 대한 분명한 당위성과, 통일이 됐을 때 북녘에 들어가야 한다는 소명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공이나 재능을 통일에 초점을 맞춰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 남북 관계가 어떻고 북한이 어떤 모습인가를 들려줍니다. 

Q: 길을 찾은 학생들이 있나요?

: 예를 들자면 생명공학을 전공하던 학생이 있었어요. 이 학생이 슈퍼 고구마를 만들어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공부하다가, 그 분야는 생명공학이 아니라고 해서 농촌진흥청에 들어가서 잠깐 일도 하고, 아예 원예 분야로 옮겼어요. 

Q: 원예요? 의외인데요?

: 고구마나 감자를 개발하는 건 생명공학이 아니라 원예라고 하더라고요. 전공을 바꾼 거죠. 또 원래는 고구마를 하려고 했는데, 북한 지역에는 감자가 더 좋다고 해서 그 방면의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어요. 박근혜 대통령도 농경이나 기타 분야들에서 우리의 기술들로 도와야 한다고 했죠. 이처럼 다방면에서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게 목표입니다.

 

CCC 통일봉사단의 통일교육원 위탁 교육(사진 제공: CCC)

 

 다른 활동으로 학생들을 모집해서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름과 겨울에는 대학생들과 2-3주간 통일 관련된 지형을 다니는 비전 여행을 가고요. 그리고 한반도평화발걸음이라고 해서 휴전선 동쪽 끝인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서쪽 끝인 임진각 평화누리까지 300km 가까이를 걸어요. 분단의 아픔이 많은 곳을 다니면서 기도하고, 우리가 이런 현실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고심합니다. 작년에는 온누리교회와, 온누리교회와 협력하는 탈북민 공동체 한터와 같이 걸었어요. 탈북민들과 함께 걸을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통일이 되더라고요. 누가 더 낫고 우월한가가 아닌, 지급한 복장을 입고 같은 조건에서 같이 걸으면서 서로가 아무런 차이 없이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들이 작은 통일이었습니다. 이걸 겪으면서 통일된 이후를 이렇게 해나가면 되겠다는 걸 느꼈습니다.

 

CCC 한반도평화발걸음 로고(사진 제공: CCC)

 

 학기 중에도 방학 때 통일에의 열망을 품은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학생들이 학업으로 바쁘니까 뉴스를 잘 보거나 소식을 듣거나 정말 이슈화하지 않으면 보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쉽게 접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사들을 정리해서 PDF 파일로 만들어 뉴스레터를 발송합니다. 그리고 매달 통봉단 채플이 있어요. 모여서 강의도 듣고 기도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거죠.

  

Q: 학생들에게 통일의 당위성을 어떻게 말씀해주세요

: 분단 현실에 그리스도인들이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하고, 민족의 죄과를 짊어져야 할 영역이라고 합니다. 민족의 죄라고 말할 때, 교회의 잘못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가 과오를 저질렀고, 그걸 바꿔야 한다면, 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죠. 통일이 되든 안 되는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도록 우리가 발 벗고 나서는 것입니다. 통일을 해도 된다 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데 통일을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냐는 관점으로 접근을 하는 거죠.

 

Q: 간사님께서 보신 남북 관계나 동북아 정세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말씀해주시나요?

A: 국제 정세나 여러 부분들에 있어서도, 통일은 회복이고, 평화로의 회귀이자, 갈등의 종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통일의 모델은 한반도가 하나가 되어서 동북아의 다리 역할과 평화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단정하긴 어렵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국제적으로 여러 갈등이 있을 때 평화적으로 중재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예컨대 스위스 같은 중립 국가라고 봐요.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든 못 되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각 나라에 대한 전문가들도 많이 나와야 하고, 그 나라에 우리 입장을 대변할 수 있고,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며, 국제 관계를 풀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저보다 학생들이 전공자니까 제가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죠. 하지만 방향성만큼은 우리가 한쪽에 치우치거나, 특정 나라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길을 가도록 안내합니다. 남북이 하나 돼서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과 일본 사이세서 중재자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외교관들과 정치가들로서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비전을 심는 거죠. 이렇게 하니까 대통령을 하겠다는 학생들도 나오고, 통일부 장관을 하겠다는 학생들도 나옵니다.

 

작은 통일을 이루었던 한반도평화발걸음(사진 제공: CCC)

 

Q: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요.

: 모든 일마다 기억나네요. 지금 강원도 양구에 있는 파로호에 갔던 일이 떠올라요. 깨트릴 파() 자에 오랑캐 로() 자를 써요.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 3만 명인가 5만 명 정도를 사살해서 수장시킨 곳이에요. 그처럼 중공군들이 국가에서 보내서 당시의 중국 청년들이 많이 죽은 거죠. 그때 있었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처럼 큰 길도 아니고 소로니까 주요 거점에 공용화기 등을 여럿 배치해서 패전하고 후퇴하는 몇 만 명을 사살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학살이라고 접근하고 싶진 않아요. 어쨌든 군인으로 왔고, 군인이 군인에 의해서 전투 중에 죽었으니까요. 다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평화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그들도, 한국군도, 인민군도, UN 군도 다 마찬가지로 청년들인데, 그 많은 청년들이 죽어가는 그 자체가 너무 안타까운 과거이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과거라는 겁니다. 그들이 어떤 국적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많은 사람들이 이 땅 가운데 전쟁과 분쟁이란 이름으로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들을 하고, 학생들과 함께 이 마음을 나누고 같이 기도했어요. 항상 그곳에 가면 그 기도를 해요. 다시는 이 일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도록. 한반도평화발걸음을 하면서 곳곳에 그런 흔적들을 많이 접해요. 북한군에 의해서, 한국군에 의해서, 전쟁이란 이름으로요. 사람들이 많이 죽은 곳마다, 위령비나 전적비가 많이 서 있더라고요. 우리나라 군이 많이 죽었으면 위령비가 있고, 우리가 많이 죽였으면 전적비가 있고요. 파로호도 그런 전적비가 있는 곳이에요. 이 한반도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겠다는 마음들을 나누는 동행이 한반도평화발걸음입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군인들이 죽은 건 어떻게 보면 기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분쟁이나 전쟁으로 어떤 사람이든 죽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는 게 중요하죠.

 

CCC 통일봉사단의 강계승 간사(왼쪽)와 이명근 간사(오른쪽)

 

Q: 강계승 간사님은 어떤 일들이 기억에 남아요?

: 통봉단 간사로 지원하기 전인 작년 여름에 동북 지역으로 비전 여행을 다녀왔었어요. 그때 북한 주민들의 안타까움, 여러 국제 관계 속에서의 어려움, 통일로 가는 길 안에 있어서의 어려움이나 안타까움을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간사를 지원한 거죠. 간사로 발령받고 나서는 이명근 간사님을 보조하여 학생들과 동북 지역을 찾았어요. 그때에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가 학생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안타깝고 애통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번에는 통일의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인 건 여전히 변함없지만, 참여하는 학생들의 눈물과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망을 보았습니다. 제가 학생으로 참여했을 때와 간사로 학생들과 갔을 때와 대조돼서 기억에 남아요.

 

Q: CCC 통일봉사단에 지원한 특별한 계기나 동기가 있나요?

: 대학생 때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북한이나 통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이후 캠퍼스에서 CCC 협동간사로 활동하며 잊었다가, 동북 지역 비전 여행에 참여하면서 전에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이 다시 떠올랐어요. ‘내가 어떻게 통일을 도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분야에서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비전 여행에서 답을 발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비전 여행에서 이명근 간사님께서 강의와 조언으로, 통일부 장관이 되겠다는 학생들도 많은데, 그런 학생들이 나오기까지 학생들에게 꿈을 보여주고 비전을 심어줄 수 있는 간사가 너무나도 없다고 하셨어요. 그 당시 통봉단을 이 간사님 혼자서 담당하고 계셨거든요. 이 간사님이 이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는데 굉장히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사는 학생에게 다리가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라는 말이 와닿았고, 비전 여행을 마치고도 잊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통봉단 간사 지원을 결정했어요. 저도 간사로서 평생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북한이나 통일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관련 공부를 이어가고 싶고, 통일의 때가 왔을 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CCC 통일봉사단 비전 여행(사진 제공: CCC)

 

Q: 앞으로의 계획이나 방향성은 어떻게 되나요?

: 3개월 정도 국내와 해외를 오가는 통일봉사단 NK스쿨을 준비하고 있어요. 한 달은 북한과 통일에 대한 교육을 받고, 다른 한 달은 직접 동북 지역에서 관련된 일들을 경험해 볼 겁니다. 나머지 한 달의 절반은 독일에 가서 통일 과정을 도왔던 분들을 만나보고, 독일 통일의 현장을 찾으며 배우는 거예요. 또 절반은 한반도평화발걸음을 휴전선 부근을 걷되, 한반도에서 분단이라는 이유로 아픔이 많은 곳을 다닐 계획입니다. 서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노근리[각주:2], 여수·순천[각주:3], 제주[각주:4]가 있고요, 동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울진·삼척[각주:5], 강릉[각주:6] 등이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에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는 아픔들을 평화로 녹여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올 하반기에는 시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 부분들이 잘 된다면 실제적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그룹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합니다. NK스쿨 출신이 CCC 안에서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에 나가서도 평화적인 관점으로 살아간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요?

 평화적인 관점이라고 하니 인상 깊었던 일화가 떠오릅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한 월요 기도회를 많이들 이야기하잖아요? 어떤 목사님이 당시의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는 단 한 번도 통일을 위해 기도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너무나 끔찍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감히 통일시켜 달라고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다. 다만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다. 이곳에 평화를 세울 수 있도록, 그리고 독일이 저지른 범죄가 많기 때문에, 이제는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주시도록 계속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선물로 통일을 주셨다라고 하는 겁니다. 통일만이 목적인지, 아니면 통일 이후에 평화적으로 변화될 것이 목적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마음으로 NK스쿨을 통해서 좀 더 전문적으로 통일과 평화를 준비하고 이루는 사람들을 배출하고 싶습니다. 통일만이 목적인 사람이 아니라, 통일은 과정이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동기 부여를 하고, 비전을 심고, 계속해서 돕는 것이 저희의 향후 계획과 목적이죠.

 

1989년 10월 16일 구 동독 라이프치히에서의 시위 현장(사진: https://www.mtholyoke.edu/courses/dvanhand/germ325/opposition/kirche/1989.html)

 

 그리고 CCC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년 금식수련회 때 통일 통장을 개설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적더라도 일정 금액을 모으자는 거죠. 재정적인 부분이 큰 건 아니겠지만 이걸 시작해서 한국교회에 호소하려 해요.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통일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잖아요. 그렇다면 이 부분도 그리스도인들이 일부를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전에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사람들이 CCC에 헌금한 돈으로 저희가 젖염소를 사서 보내는 개념이었어요. 하지만 통일 통장은 헌금하는 개념이 아니라 본인 명의의 통장인데 통일을 위해서 차곡차곡 모아놓자는 거죠. 이런 걸 하면 비난하는 사람들은 당장 굶어죽는데 미래를 위해서 모으기만 하면 뭐하냐고 해요. 그런데 우리은행에 사랑나누미라는 통장이 있습니다. 기부금 관련된 통장인데, 100만 원까지는 연리 2%를 추가해 줘요. 100만 원을 입금하면 이자가 2만 원이 되고, 그 이상은 1퍼센트씩 올라가요. 200만 원을 입금하면 3만원이 이자로 나오죠. 이렇게 개설한 통장에 기부금이 들어오면 특수 경로로 북한의 일부지역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쪽 학교랑 연계해서 아이들을 먹이는 거죠. 이미 NS 지역에는 지원하고 있고, 그 외 지역으로 넓히려고 합니다. 그곳에 통일통장의 이자를 보내서 빵 공장과 두유 공장을 지어, 아이들이 최소한 하루에 빵 하나 두유 한 잔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겁니다. 적은 금액이지만 당장 아이들이 연명할 수 있고 생존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빵과 두유를 하루에 하나씩만이라도 제공하려고 해요. 이것과 NK 스쿨을 준비하고 있어요.

 통일 통장의 원금은 통일이 되면 3가지 방향으로 학생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 봉사를 하러 가는 사람이 원금을 찾아서 사역비로 쓰는 겁니다. 두 번째는 북한 지역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가는 사람을 후원하는 것이고요. 마지막 세 번째는 북한 지역에 들어가지도 않고 주위에 가는 사람도 없다면, 그때는 통일봉사단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가 그 재정으로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먹이는 겁니다. 액수가 클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돈이 없는 대학생들이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 교회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각자 교회 이름이 됐든 뭐가 됐든 준비를 한다면 최소한 돈 문제만큼은 통일의 발목을 잡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 비축한 재정은 통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좋은 종잣돈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요즘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적으로 물의도 많지만, 한국교회가 통일을 위해서 자본이든 준비된 사람이든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다면, 한국교회가 변화되고 한국교회의 무너진 인식들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통일의 때에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갑자기 내놓으려면 부담이 되니까 미리 준비하는 거죠. 5년 내지 10년 잡고 준비를 해보자고요. 어차피 통일은 적금 만기 전에 되더라도 돈은 계속 들어갈 테니까요. 어찌됐건 우리가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걸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 작년에 탈북민 아이들과 한반도평화발걸음을 걸었다고 했잖아요? 걸을 때 남북이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한 기사가 떴어요. 걷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까 정말 기쁘고 감사했죠. 마지막 날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잘 이루어지면, 또 다른 이산가족인 탈북민들, 납북자들이 만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했는데, 함께 있던 탈북민 아이들이 너무나도 슬피 울면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이산가족 상봉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죠. 그때 생각이 나네요.

 

귀한 시간 내주시고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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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의 의견과 기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관련 링크>

· 통일부 통일교육원: http://www.uniedu.go.kr/uniedu/main/main.do

·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 https://reunion.unikorea.go.kr/reunion/index

· 한국대학생선교회(CCC): http://www.kccc.org/

· CCC 통일봉사단: https://www.facebook.com/New.Kingdom.Korea

· 온누리교회: http://www.onnuri.org/

· 노근리 평화공원: http://www.nogunri.net/html/kr/index.html

· 기사: 고병선 기자(통일부 대학생기자단 4기), <통일 선배, 독일의 중심에서 통일을 느끼다 (3)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http://blog.unikorea.go.kr/1867)

 

 


  1. 둥북삼성(東北三省, 둥베이삼성)은 중국에서 북한과 접한 흑룡강성(黑龍江省, 헤이룽장성),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의 세 지역을 말한다. [본문으로]
  2. 노근리양민학살사건: 1950년 7월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사살한 사건.(요약) - 두산백과 via 네이버. 자세히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566&cid=40942&categoryId=31778 [본문으로]
  3. 여수·순천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요약) - 두산백과 via 네이버. 자세히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073&cid=40942&categoryId=39201 [본문으로]
  4. 제주4·3사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요약) - 두산백과 via 네이버. 자세히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380&cid=40942&categoryId=31778 [본문으로]
  5. 울진삼척지구무장공비침투사건: 1968년 11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유격대 활동거점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한 사건.(정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via 네이버. 자세히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0181&cid=1598&categoryId=1598 [본문으로]
  6. 북한잠수함침투사건: 북한의 대남 침투 사건 중 잠수함을 이용한 해상 침투 사건.(요약) - 두산백과 via 네이버. 자세히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7927&cid=40942&categoryId=3177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