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9일부터 23일까지 4박 5일 동안 중국 상하이(上海)부터 난징(南京)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 주석의 발자취를 좇는 <청년백범 3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답사 - 백범 김구 주석의 발자취를 좇아서> 행사가 청년백범의 주최로 열렸습니다.
독립의 역사를 공부하며, 통일 미래의 꿈을 꾸었던 이번 대장정에 저도 함께 하였는데요, 지금부터 그 여정을 상세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 전 단체사진을 찍는 답사단)
왜 대한민국 임시정부인가?
본격적으로 이번 여정을 소개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를 알아볼까요?
우리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前文)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구절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임을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국기(國旗)인 태극기와 국가(國歌) 애국가 역시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며, 국군 역시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을 계승한 것이기에, 우리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했던 태극기)
그렇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번 대장정은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우리나라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해하고, 또한 앞으로 맞이할 통일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그려보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습니다.
초라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19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답사단은 상하이 푸동국제공항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곧바로 마당로 306동 4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갔습니다. 흔히들 지금 남아있는 청사를 상해 임시정부의 유일한 청사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이 청사는 상하이 시절의 마지막 청사입니다.
(사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입구)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 이후,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내에서만 청사를 두고 활동하였는데, 그 안에서조차 무려 12번 이상 옮겨 다녔다고 하며, 현재 남아있는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하던 마지막 청사입니다. 답사단이 찾아갔던 임시정부 청사가 바로 이곳입니다.
(사진: 좁고 초라했던 임시정부 청사)
그러나 부푼 기대감을 안고 도착한 임시정부 청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청사 옆은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어, 중국인들이 빨랫감을 널고 있고, 청사 내부는 비좁아 한 사람씩 줄을 서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나라 잃은 망명정부라지만 이렇게 허름한 곳이 정부기관이었다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엄청난 재정난으로 인해 이 허름한 청사의 임대비용마저 제대로 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미주 동포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자금요청을 하는 일이 태반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김경준 기자)
초라한 청사를 둘러보고 나오니,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였던 선열들께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쑹칭링능원을 참배하고
상하이에서의 이튿날 아침, 답사단은 쑹칭링능원(宋慶齡陵園)을 방문하였습니다. 원래 이곳은 '만국공묘(萬國公墓)'라 불리는 곳이었는데요, 상하이 조계 시절 많은 나라(만국)의 외국인들의 유해가 안장된 공동묘지(공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국부(國父)였던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나의 부모님 옆에 묻히고 싶다."라고 하여, 결국 만국공묘 내 그녀의 부모님 무덤 옆에 소박하게 그녀의 무덤이 자리 잡게 되었고, 만국공묘는 '쑹칭링능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사진: 쑹칭링 좌상과 그녀의 무덤)
현재 쑹칭링능원에는 여전히 만국공묘 시절의 '외국인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요,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타계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한국인의 묘로 확인 또는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는데, 이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계원 노백린 장군, 예관 신규식 선생,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김인전 선생 그리고 안태국, 윤현진, 오영선 선생 등이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신원이 확인된 요인들의 유해는 1993년과 95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국내로 봉환되었습니다. 그러나 묘비에 영문약자로만 쓰여져 있어, 여전히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사진: 쑹칭링능원 내 외국인묘지)
답사단은 죽어서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한국에서 공수해 온 제물들을 놓고 간단하게나마 위령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고국으로 모셔가겠노라 다짐하였습니다.
(사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위령제)
그러나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이역만리에서 잠든 이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완전한 조국의 독립이었을텐데, 지금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려 여전히 독립과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땅은 반으로 갈린 땅이 아니라, 하나 된 대한민국일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느끼며 답사단은 다시 한번 통일에 대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안타까운 한숨만 나왔던 자싱의 '김구피난처'
상하이를 떠난 답사단은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現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상하이사변 승전기념 및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에서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 의사가 물병 폭탄을 던져 침략원흉들을 처단하는 '홍커우공원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의거를 주도한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넣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조계에서도 더 이상 임시정부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입장에 처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김구 선생 또한 자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사진: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 의사와 한인애국단 선서 - 출처: 국가보훈처)
저장성장이었던 추푸청(褚輔成)의 도움으로 추푸청의 양아들 천퉁셩(陳桐生)의 저택이 위치한 자싱 매만가(梅灣街) 76호에 은신처를 마련한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광동인 '장진구'로 행세하며 도피생활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곳은 '김구피난처'라는 표지석과 함께 당시 은신처가 잘 보존되어오고 있는데요, 저택의 가장 깊숙한 방으로 들어서면 옷장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옷장으로 위장한 김구 선생의 은신처 입구였습니다. 그 옷장 문을 열면 나오는 계단을 올라가야 비로소 김구 선생의 침실이 등장합니다.
(사진: 자싱 김구피난처 입구)
(사진: 옷장으로 위장한 침실 입구)
김구 선생은 이 방에 사방으로 창문을 틔워놓고 수시로 확인하였는데요, 만약 위험상황이 발생하면 천퉁셩이 창문 맞은 편으로 평소와 다른 색깔의 빨래를 걸어놓음으로써 위험신호를 보냈고, 이를 확인하면 김구 선생이 즉시 도주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마룻바닥을 뚫어 만든 도주로)
그런데 특이한 점은 바로 마룻바닥입니다. 평소엔 평범한 마룻바닥이지만 위급상황 시에는 그 바닥을 뜯을 수 있게하여, 구멍을 확보하고 옆에 있는 사다리를 내려 재빨리 내려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확보한 도주로의 끝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에는 항상 나룻배가 묶여있어 바로 호수를 통해 도주할 수 있게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확보해놓은 것이었습니다.
(사진: 도주로의 끝에 위치한 호수와 태극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는 참가자들)
이렇듯 치밀하게 안전장치를 해놓은 만큼, 독립운동은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처절하게 독립운동을 해야만 했던 선열들을 생각하니 존경의 마음이 절로 들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놀잇배 위에서 열렸던 국회
'김구가 가는 곳이 곧 임시정부가 가는 곳'. 김구피난처 근처에 위치한 일휘교(日暉橋) 17호에는 '임시정부 요인 숙소'가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김구 선생의 가족(어머니 곽낙원 여사, 아들 인)을 비롯하여 <장강일기>로 유명한 수당 정정화 가족과 이동녕 선생, 엄항섭 선생의 일가가 옹기종기 모여 거주했다고 합니다.
(사진: 임시정부 요인 숙소)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뒤에,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호숫가에 놀잇배를 띄워놓고, 배 위에서 임시의정원 회의와 국무회의를 개최하는 등 일제의 감시를 피해 활동하였습니다. 임시의정원은 오늘날 국회이며, 국무회의는 오늘날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국정에 대해 의논하는 회의이니, 작은 놀잇배 위에서 국회와 국무회의가 열린 셈입니다. 선열들이 얼마나 어렵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사진: 자싱 피난시절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피난처를 제공해 준 천퉁셩)
그러나 자싱에서의 피난생활도 잠시, 일제의 추격망에 포착된 김구 선생은 다시 자싱의 한 현(縣)인 하이옌(海鹽)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남북호(南北湖)라는 거대한 호수로 둘러싸인 산 속 별장, 재청별서(載靑別墅)로 피신한 선생은,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경치를 유람하며 잠시나마 한가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김구 선생이 피신했던 재청별서)
그러나 김구 선생의 가슴은 여전히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머릿 속에서는 독립운동전선의 통일과 새로운 독립운동을 위한 계획이 끊임없이 구상되고 있었습니다.
- 2부에서 계속 -
[출처 및 참고문헌]
1.「백범일지」,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5.
2. 청년백범(http://cafe.daum.net/490626)
3.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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