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빈 기자의 북중접경지역 탐방시리즈 제2탄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를 찾아서'입니다. 정식 명칭은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이지만 '일본관동법원'이라고도 부릅니다. 일본관동법원은 뤼순감옥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관동법원을 알려면 그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여순과 대련의 러시아 조차지, 남만주 철도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일본이 철도 수비를 위해 설립한 곳이 바로 ‘관동도독부’ 입니다. 관동도독부는 군사, 행정, 사법의 권한을 총괄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906년 9월 1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이 뤼순에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은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일제의 상징이었습니다.
탐방 시리즈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뤼순감옥이 항일투쟁인사들을 고문하고 투옥하던 곳이었다면, 일본관동법원은 항일투쟁을 벌인 한국과 중국 및 여러 인사들의 재판을 실시하던 곳입니다. 일본관동법원구지 전시는 역사에 대한 회고와 당시 모습을 복원하여 40년간 일본 식민통치의 죄상을 단면적으로 폭로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은 특히 안중근 의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에 성공한 이후 관동법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는 이 재판장에서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토를 사살한 것에 대해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총살한 것이라며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하였습니다.
안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기 까지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1910년 2월 7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어, 2월 14일 6차 공판이라는 고속 재판으로 사형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 당시 영국의 '더 그래픽'지는 이 재판을 두고 “세기적인 재판의 승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월계관을 거머쥐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나갔다. 그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렇게 일본관동법원은 항일지사들에 대한 탄압의 도구로 사용된 사법기구였습니다.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가 세워진지 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그 시기의 침략과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는 커녕 갖은 망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한국으로 국난을 헤쳐 나갔던 역사는 아직까지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뤼순감옥'과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는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개척해 가는 통일 대한민국을 꿈꿀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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