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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2013 평화벨트 DMZ 248km 대장정>을 가다 - 3부

드디어 대장정의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영하 14도까지 떨어진 철원의 아침 날씨에 다들 당황한 듯하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전방의 추위를 직접 겪어보니,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전방에서 군 생활하는 국군 장병들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안보의 중요성을 실감했던 제2땅굴

대장정 팀은 첫 번째 일정으로 철원 제2땅굴을 방문하였습니다.

(사진: 제2땅굴 입구사진)


제2땅굴은 1975년 3월 24일,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총 3.5km 길이의 남침용 지하땅굴로, 한 시간에 소형야포와 소형짚차와 함께 1만 6천 명의 중무장 병력이 이동 가능할 정도로 넓은 곳입니다. 제2땅굴은 1973년 11월 20일 6사단 청성부대가 경계작전을 수행하던 중 지하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음을 청취한 후, 이를 확인하기 위해 1974년 12월 16일부터 1975년 2월 7일까지 끈질긴 시추작업에 착수하여 총 45개의 시추공 중 7개가 지하로 관통됨으로써 감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군 제5공병여단 예하 123공병대와 현대건설이 합작하여 1975년 3월 1일부터 24일 간에 걸쳐 차단터널(108m)을 굴착 작업한 끝에 비로소 그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군사분계선에서 우리 측으로 1,100m까지 파내려왔는데, 당시 남북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대화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남한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땅굴의 존재가 국군에 의해 발각되자, 북한군은 급하게 땅굴을 메운 뒤 공사를 중단하고 북으로 도주하였는데요, 메운 땅굴 뒤로 지뢰와 부비트랩 등을 설치해놓는 바람에 우리 군이 수색작전 도중 폭발하여 故 김호영 중사를 포함한 총 8명이 사망하는 비참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진: 제2땅굴 수색작전 중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


대장정 팀은 땅굴에 들어서며,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에 '안전모'를 쓰고 내려가야 했는데요, 깊고 어두운 땅굴을 구부정하게 걷다보니 모두들 허리통증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을 파기 위해 북한에서 강제 동원된 인부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어야 했을지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땅굴의 끝머리에는 300m 앞이 군사분계선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더 이상의 출입을 금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보며 이곳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시도했다는 생각에 대장정 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 했습니다. 철문 앞에는 '평화통일'이라 적힌 통일항아리가 놓여있었는데요, 정말 평화통일이 이루어져 이 좁디좁은 땅굴이 남침로가 아닌,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원해보았습니다.


[Tip] 북한이 땅굴을 팠다는 세 가지 증거

1. 다이너마이트 장전공의 방향이 북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음
북에서 폭발을 하면서 갱도공사를 했다는 증거

2. 갱도 배수로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하고 있음
 갱도 공사 후 물을 빼내는 이중작업을 피하기 위해 1,000m 당 약 3도 정도의 경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

3. 북한과 남한의 굴착공법이 다름
 북한이 파내려온 구간은 폭발공법을 이용, 벽면이 그을려진 반면에 남한은 대형 굴착기를 이용하기에 색변화 없음


대동방국을 꿈꾸었던 궁예의 흔적은 어디가고

제2땅굴을 나온 대장정 팀은 '철원평화전망대'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간 중간 재두루미가 눈 덮인 철원평야를 거닐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시베리아와 몽골, 중국 등지에서 번식하는 재두루미는 10월 하순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와 3월에 다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곳 철원은 재두루미가 겨울을 나기에 기후도 적절할 뿐만 아니라, 인적이 드문 전방이라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재두루미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냉혹하기만 한 분단의 현실이, 재두루미에겐 최적의 생존조건이라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습니다.


(사진: 눈 덮인 철원평야를 걷는 재두루미 가족)


철원평화전망대는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전망대로, 중부전선과 그 너머 북한 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전망대 너머로 보이는 넓은 철원평야는 그 옛날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우고 도읍으로 청했던 곳입니다. (911년) 이곳에는 외성 둘레가 12.5km, 내성 둘레가 7.7km의 거대한 도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당시의 위용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성이 있었다는 흔적만 간신히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도성 자리 한가운데를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갈라놓고 있어, 더 이상의 확인작업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하여 이곳은 남과 북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조사해야 할 민족적 과제로 남은 곳이기도 합니다. 분단은 이렇게 또 다른 아픔을 낳고 있었습니다.


(사진: 철원평화전망대로 올라가는 모노레일과, 평화전망대)

(사진: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성 모형도)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원평화전망대를 나와 도착한 월정리역(月井里驛)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 철마가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원선은 경술국치 이후 한국인들의 강제동원과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 1914년 8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원산 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연스럽게 폐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진: 월정리역)


현재 월정리역사 뒤로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 아래 6.25전쟁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기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북한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누워있습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적힌 간판 아래로는 북한 지역인 강원도 평강군까지 불과 19km라는 안내가 써 있었습니다. 서울보다도 북한이 훨씬 가까운 이곳에 서니 이렇게 가까운 곳을 두고도 갈 수 없는 현실에 기가 막혀하는 것은 비단 기자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하는 바인 듯 했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백마고지

철원군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일 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 30만 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백마고지를 포함한 중부 및 동부 전선의 전투를 모티브로 한 영화가 바로 <고지전>입니다.


(사진: 백마고지 전적지의 위령비 앞에서 묵념하는 대장정 참가자들)

(사진: 백마고지 전적지 정상 위에 위치한 '평화의 종' - 종 뒤로 보이는 고지가 백마고지)


현재 백마고지는 DMZ 비무장지대 남방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으며 대정정 팀은 백마고지 전적지에 올라 저 멀리 백마고지를 조망해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한 고지에서, 60여 년 전에 무려 24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습니다. 백마고지를 바라보던 맹지윤 씨(23, 한국방송통신대)는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치열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대장정을 마치고 귀가하면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한 영화 <고지전>을 한 번 보고, 전투의 치열함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단결로 통일독립을 전취하자

백마고지 탐방을 끝으로 대장정 팀은 마지막 코스인 경기도 파주의 '임진각'으로 향했습니다. 군사분계선 7km 남쪽에 조성된 임진각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북한전망대입니다. 임진각 한 켠에는 망배단(望拜壇)이 설치되어 있는데요, 1985년 9월 26일 조성된 이곳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매년 명절 때마다, 북한에서 돌아가신 조상들께 제사지내고 조국통일의 염원을 비는 제단입니다. 대장정 팀이 갔을 때에도 어느 실향민 가족이 망배단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진: 망배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실향민 가족들)


자유의 다리는 망배단 뒷 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 6.25전쟁 정전 후 포로 1만 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남한으로 귀환하였기 때문에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다리 뒤로는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교가 있는데요, 원래 상행과 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이 '자유의 다리'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진: 자유의 다리와 대장정 참가자들)


임진각에서의 마지막 행사로, 대장정 팀은 각자의 염원을 담은 리본을 철조망에 달았습니다. 저 김경준 기자는 백범 김구 주석의 어록을 인용하여 "단결로 통일독립을 전취하자"는 문구의 리본을 달았고, 다른 사람들은 "행복한 통일을 기원해요", "충성!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필승!", "평화통일의 주역은 청소년" 등 다양한 문구로 통일에의 염원을 드러냈습니다.


(사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리본들)


대장정의 마침표

임진각에서의 일정을 끝으로 2박 3일 간의 <2013 평화벨트 DMZ 248km 대장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번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맹지윤 씨(23, 한국방송통신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단과 통일을 생각해볼 수 있는 훌륭한 프로그램이었고, 무엇보다 무료였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STAFF들의 인솔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학생들이 탐방에 진지하게 임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여 무척 아쉬웠다. 물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세대가, 분단의 엄혹한 현실을 그대로 느끼기엔 괴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미래 통일 한국에서 살아갈 통일세대인만큼, 분단의 현실을 가슴 깊이 느끼고 통일을 주체적으로 맞이하려는 의지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이번 탐방에서의 소감을 자세하게 밝혔습니다.

(사진: 김경준 기자와 민주평통 동작구협의회 소속 대장정 참가자들)


또 고등학생 신분으로 참여한 한준영 군(18, 망포고 2학년)은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하지만 일정이 빡빡해 이동하기에 바빴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다음 행사 때부터는 일정을 넉넉히 잡았으면 좋겠다."라는 소감을 밝혔고, 여성 참가자였던 강수진 씨(24, 숙명여대)는 "분단의 현실을 느껴보고, 통일을 염원할 수 있는 행사여서 좋았다. 그러나 처음 일정표를 받았을 때에는 다양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많이 생략되어 아쉽다."라며 아쉬운 점을 밝혔습니다.


(사진: 대장정 마지막 단체사진)


참가자들의 소감에서도 드러나듯이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느끼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고, 공부와 취미생활에 바빠 분단과 통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없었던 청소년들에게 이번 여행은 잠시나마 통일에 대한 생각을 가져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2박 3일 간의 대장정은 우리 청소년들 스스로 미래 통일한국의 주역이라는 자부심과 의무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통일을 맞이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여 통일을 향한 우리의 대장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상으로 DMZ 대장정 현장에서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5기 김경준 기자였습니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네이버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