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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전쟁이 남긴 상처 '파괴된 문화유산' (1) - 어진(御眞)

2013년 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통일 미래의 꿈'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뱀의 해'인 올해 뱀에만 머물지 마시고 용으로 승천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특히 휴전협정을 맺은지 60주년이 되는 해인데요, 휴전협정 60주년 특집으로 <전쟁이 남긴 상처 '파괴된 문화유산'>이라는 주제로 기획 연재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편은 바로 어진(御眞)입니다.

어진(御眞)은 '임금의 초상화'를 말합니다.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에서는 왕이 곧 국가였기 때문에 어진을 그려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는 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임금의 초상화이기 때문에 어진 제작을 위해 뛰어난 화사(畫師)들이 동원되어 제작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그림이 낡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후대의 화사들은 원본을 모사하는 방식으로 어진을 영구히 보전하려 하였습니다.


조선왕실의 어진

조선왕실에서는 창업군주인 태조부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임금이 자신의 어진을 그렸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그 제작기법이 매우 정밀하여 얼굴에 있는 미세한 곰보자국과 터럭 하나까지도 그대로 묘사할 정도였는데요, 따라서 임금의 어진은 그 당시 임금들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어진이 완성되면 경복궁을 비롯한 도성 내 궁궐에 진전(眞殿)을 마련해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임금의 용안이 봉안된 진전은 신위를 모신 종묘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신성한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08년, 일제는 관리의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여러 곳에 나뉘어져 있던 어진을 창덕궁의 선원전으로 옮겨 통합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진에게 찾아온 가혹한 시련

수백 년의 세월을 내려오며 보전되었던 어진. 하지만 어진은 세월을 거치며 가혹한 시련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시련은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도성을 넘보는 지경에 이르자, 선조 임금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북쪽으로 몽진(임금이 피난가는 것)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어진들은 대부분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6.25 한국 전쟁으로 인해 어진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기에 이릅니다. 19506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초기 북한군이 승승장구하며, 국군이 남쪽으로 패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우리 정부는 서울에 있던 각종 문화유산을 부산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창덕궁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들 역시 이 무렵에 이송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부산으로 옮겨진 어진들은 부산시 동광동에 위치한 부산국악원 내 창고 건물에 임시로 보관되었습니다.

부산으로 옮겨진 어진들은 다행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막 끝나고 아직 어진들을 서울로 옮기지 못한 시점이었던 19541210일 새벽, 어진이 보관된 창고 근처 피난민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불이 급속도로 번지는 바람에 창고에 불이 옮겨붙어 어진을 비롯한 왕실의 유물들이 속수무책으로 화염에 흽싸이고 말았습니다.

(사진: 1954년 12월 10일 새벽 부산 동광동에서 발생한 화재 사진)

이 당시 화재로 인해 어진을 포함한 약 3,400여 점의 궁중 유물이 소실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재 현장에서 간신히 7점의 어진을 구할 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그려진 임금들의 어진의 수에 비할 때, 터무니 없이 적다고 하겠습니다. (영조가 즉위하기 전 그려진 어진, 사후 추존된 익종의 어진 등을 제외하면 완벽한 형태로 현전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고종, 순종의 어진 단 네 점 뿐입니다.)

만약 6.25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한숨만 나옵니다.

 

(사진: 불타버린 철종 어진과 태조 어진)


북한에도 어진이 남아 있을까?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은 서울(한양)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어진들은 도성 내 궁궐에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어진들은 북한 지역에도 봉안되었는데요,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함흥본궁과 평양행궁에 각각 태조 이성계의 젊은 시절 어진, 대한제국 광무 황제(고종)와 융희 황제(순종)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한국전쟁 당시 공습으로 인해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함께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북한 학계에서는 조선 임금의 어진이 있다는 보고를 한 바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 함흥본궁에 봉안되어 있던 젊은 시절의 태조 이성계 어진, 일제강점기 당시 촬영되었다)

 

불타버린 어진이 보여주는 전쟁의 상흔

왕 한 사람이 곧 국가였던 조선시대. 왕의 어진은 일개 초상화가 아니라 한 시대를 통치했던 지도자에 대한 기록이자,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몇 점 남지 않은 임금의 어진을 보며 불타 없어져버린 어진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선대로부터 몇백 년에 걸쳐 내려오던 문화유산을 전쟁으로 인해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참담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불타버린 어진을 보며 문화유산을 우리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에 가슴이 착잡할 따름입니다. 불타버린 어진들은 우리에게 다시는 우리가 겪은 수난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듯 합니다.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땅 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진출처 및 참고문헌>

1. 불멸의 초상, 어진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4&contents_id=17993)

2. 네이버 백과사전

3. [기사] 태조 이성계는 광대뼈 도드라진 무골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0148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