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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북한이탈주민을 위하는 종교인, 임창호 목사님을 만나다

 

 

 

  지방에는 처음으로 생긴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교회인 부산 장대현교회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갔던 날, 임창호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임창호 목사님은 처음 기자와 통화할 때부터 “OK~”를 연발하시던, 무척 쾌활하신 분이었어요. 요즘 연말이라 부쩍 바쁘시고 정신없으실 텐데도, 인터뷰 내내 밝은 분위기로 즐겁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상생기자단이라고? 상생, 참 좋은 말이다. 서로 살리면서 산다는 뜻 아니냐, 맞지?”

  통일부 상생기자단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임창호 목사님은 활짝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자로서 취재를 하기에 앞서 소개를 드릴 때면 상생기자단이라는 이름을 먼저 말하게 되는데, 이 이름을 추켜 세워주시니 내심 뿌듯하더라구요. 이름이란 게 상대방에게 첫인상을 가장 먼저 심어주기 마련인데 이렇게나 손쉽게 대번에 호감을 줄 수 있다니, 상생기자단이라는 말의 뜻이 참 좋다고 새삼 생각했어요.

 

 

(장대현 교회)

 

 

 

 

  임창호 목사님은 그동안 마땅한 장소가 없어 제대로 신앙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지난 2007년 장대현교회를 세우신 분이세요. 임 목사님은 장대현교회에서 목사로 계실 뿐 아니라, 현재 고신대학교 교수이시기도 합니다.

  임창호 목사님은 집회를 주관하거나 교리를 가르치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탈주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또한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동포의 삶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계세요. 임 목사님은 ‘북한자유를 위한 한국교회연합[KCC]’ 한국 담당자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또한 ‘북한인권단체연합회(북인연)’ 공동대표를 맡고 계신다고 해요. '북인연' 공동대표로서 임 목사님은 성명서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신다고 합니다. 지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때에는 요구 사항을 전달하기도 하셨다고 해요.

  북한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을 열심히 주위에 퍼뜨리고 다니시다보니, 임창호 목사님이 교수로 계시는 고신대학교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북한 동포를 사랑하는 모임’, ‘북사모’가 생겼다고 해요.

 

 

  연말이라 바쁘신데도 상생기자단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임창호 목사님 덕분에, 장대현교회의 한편에서 임창호 목사님과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Q. 북한이탈주민의 신앙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장대현교회를 세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A. 1993년부터 96년까지 고신대학교 교수로 지내다가 96년도부터 2006년까지 미국의 한인 이민교회에서 목사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 2004년도 2월에 북한이탈주민 한 분을 초청해서 간증하는 일이 있었다. 북한 주민의 삶이 너무나 처참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즈음 미국 미들랜드에서 북한 주민들을 위해 기도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국의 인권 단체에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정작 우리들은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 대해 너무나 무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동료 목사 몇 명과 함께 ‘기도회를 열자, 그것도 통곡 기도를 올리자’고 뜻을 모았다. ‘한국 교회는 잘 못하지만 이국에 나와 있는 우리라도 해 보자.’라는 생각이었다. 기도회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전국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그래서 2004년 9월, 통곡기도회에 1600여 명을 모았다. 당시 무척이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건이었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 나 역시 놀랐다.

  이후 2006년에 한국의 고신대학교에 재부임하면서 한국에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북한 동포를 위한 통곡 기도회를 열어보자 마음먹었다. 우리나라 6대 도시, 12개 이상의 교회를 돌며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다 2006년 12월에 부산에 사는 북한이탈주민 몇 명이 ‘지방에도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교회를 만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찾아왔다. 그래서 부산에서 첫 번째 집회와 예배를 가졌는데, 처음엔 28명이 모였다. 마땅한 장소 없이 이곳저곳 떠돌다가, 2007년 7월 부산 다대포에 자리를 잡고 장대현교회를 세웠다.

 

 

 #‘사람다운 삶’을 꿈꾸는 장대현교회

 

 

  2009년 초에 올 한해 장대현교회의 표어를 “주는 교회”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알린 바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너무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남한에서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나 주위에서 도와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는 남한 사람들보다 열악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다소 바꿔보고자 표어를 “주는 교회”로 정했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무조건 베풀자는 것이다. 매일 좋은 인사말을 나누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이웃과 나눠먹고, 좋은 소식을 나누고.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활 방식을 바꾸다보니, ‘함께 도우면서 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끼더라.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누는 삶, 베푸는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더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었다. 사실 남에게 베푸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지 않는가.

  게다가 우연찮게도 올해 장대현교회에 경사가 많이 생겼다. 경주 읍천교회에서 헌금을 보내주어 그 돈으로 장대현교회가 새 보금자리로 옮기게 되었고, 숭실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를 두고 교인들에게 “거봐라,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주시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결국엔 하나님이 다 채워주기 마련이니까. 교회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주는 연습을 많이 하자. 베푸는 삶을 살자’고 말한다. 비록 교인의 숫자가 적더라도 진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장대현교회로 만들자, 이게 나의 꿈이다.

 

 

 

 

(장대현교회를 위해 모인 헌금)

 

 

Q. 그런데 북한이탈주민이라 하더라도 일반 교회에서 남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정착에는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북한이탈주민들끼리 모이는 교회를 왜 만들게 되었나?

 

A. 일반 교회에서 남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도록 둔다. 굳이 장대현교회에 오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신앙 활동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많다. 장대현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나는 특히나 혼돈을 겪고 있는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한다. 그들은 북한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통일이 되었을 때 진정한 주역이 될 사람들이다. 올바른 통일 한국의 모습을 위해 한국에서 배우고 고민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가령 통일이 되었을 때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북한에서 나쁜 짓을 한다면 순진한 사람들이 해를 입을 것이다. 이들을 제대로 도와줄 사람이 바로 북한이탈주민이다. 정부 측에서도 북한이탈주민의 인력을 잘 활용했으면 한다. 자본주의·민주주의를 잘못 배우지 않고 직접 제대로 익힌 북한이탈주민들이야말로 통일을 올바르게 이끄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정체성에 혼란을 가질 때, 장대현교회가 그 사람들에게 위안처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장대현교회의 두 번째 기능은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이탈주민의 삶을 배우는 현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장대현교회에는 북한이탈주민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지난주에는 한 젊은 부인이 와서 놀이방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아이들 장난감을 사라면서 성금을 주고 간 일이 있다. 피아노반주자나 베이비시터로서 자원봉사를 하러 매주 오는 대학생들도 있다. 고신대학교에 ‘북한 동포를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해서 ‘북사모’라는 동아리가 생겼는데, 교회에서 행사가 열릴 때마다 와서 도와주고는 한다. 이곳이 남한 사람들이 북한 동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또 북한이탈주민들을 격려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교육의 장이자 신앙의 장인 장대현교회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Q. 곁에서 지켜본 북한이탈주민의 생활은 어떤가?

 

A.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국가고시를 보아 의사가 된 친구도 있고,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도 있다. 보험설계사로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분도 있고, 대기업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도 있다. 하지만 취직이 잘 안 되어서 많은 분들이 단순 노동에 종사한다. 오징어잡이 배에 타거나, 용접을 하거나, 막노동을 하거나. 무척 안타깝지만, 삶의 질보다도 돈이 있어야 정착이 되니까.

  20대는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고 꿈을 키우는 시기이니까 차치하고,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의 분들이 가장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자식 있고 아내 있고 부모님 계시는, 인생이 한창 다이내믹할 시기인데 할 일이 없다보니 그렇다.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그 덕에 힘이 많이 되어준다. 학원 갈 형편이 안 되는데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적도 잘 받아온다. 참 기특하지.

  노인 분들은 대개 기초생활수급으로 생활하시고, 운동 다니시거나 교회 나오시는 재미로 지내신다. 북한에서 소위 ‘끝발 날리던’ 분도 계신데, 이곳에서는 그냥 소일거리로 동네 산책하거나 노인대학에 나가시는 동네할아버지로 지내신다. 그래도 집 있고 자유로운 지금 생활이 행복하다고 하신다.

  나도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지내고, 뒤를 돌보아드리고 하는 것이 즐겁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니까. 무척 재미있다.

 

 

 

Q. 마지막으로 상생기자단을 통해 통일부에 바라거나 건의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A. 북한이탈주민의 실제 생활을 배려할 수 있는 제도가 구비되었으면 한다. 특히 북한이탈주민이 취업하기만 하면 기존에 받던 기초생활수급을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북한이탈주민이 취업하더라도 낮은 월급에 4대보험비를 제하고 나면 실제생활비는 얼마 남지 않는다. 기실 기초생활수급비와 맞먹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야 한다. 게다가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사는 게 오히려 더 유리하다.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통신비·인터넷 이용료·TV 수신료 등이 30% 할인되고 일반치료도 공짜로 받다보니, 적은 월급 받고 일할 때보다 생활비가 더 적게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북한이탈주민들이 결국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북한이탈주민이 게으르다, 적응하지 않는다.”라고 욕할 것이 아니다. 현 제도상으로는 자립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어렵다. 탈북주민들의 실상을 고려하고 ‘질’을 생각한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이탈주민들 중에서도 소위 ‘엘리트’들을 정책·정략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북한이탈주민 중에서 고급 인력, 빨리 적응하는 사람들을 활용하여 전 국민을 대상으로 북한 잘 알기 운동을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이들을 관공서 등지에 보내서 하루 2, 30분씩 강의를 하거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식이다. 독일은 통일되기 전 17년 동안 전 국민을 대상으로 경제·사회·문화 전체 영역에 대한 교육을 했다고 한다. 사실 정부 측에서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제대로 된 통일 교육을 하기 어려울 테니, 이렇게 ‘엘리트’ 북한이탈주민들을 활용하는 것이 통일 교육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종교 활동에 힘쓰는 것만으로 바쁘실 텐데도, 임창호 목사님은 이렇듯 북한 동포들과 북한이탈주민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삶이 “재밌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에 몸담고 계신 종교인이지만, 같은 교인들에만 한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 동포들까지 하나로 끌어안고자 하는 마음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임창호 목사님이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인권, 남을 진정으로 생각할 줄 아는 ‘heart’를 가진 사람,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아는 것, 진짜 행복이 무엇인 줄 아는 사람다운 삶. 임 목사님이 바라시는 이 모든 이상향은 사실 전혀 복잡한 것이 아닐 텐데 말이죠. 임 목사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얼른 제대로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 사진 : 김지애 기자(jiae3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