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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분단 66주년] 5. 1990년대의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

 

<총 5부작 기획연재>


1950~ 1990년대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의 변화 그리고 함의


 

 

 

 

 

 

 제 5부, 1990년대 북한정권의 정치, 경제노선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취임, 김정일 체제의 등장을 알리다.

 

 

 김정일은 1993년 4월 당, 정, 군 등 주요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구축하기 위해 조선노동당 국방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2월에는 경제회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농업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의 3대 제일주의라는 원칙을 세웠는 데 이것은 인민들의 먹을거리와 소비품의 해결 그리고 동맹 국가들의 붕괴로 나빠진 무역 활성화를 강조한 것이었다.

 

 1994년에는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했다. 김정일은 북한의 국부이자 체제의 정당성을 대표하는 김일성의 신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었다. 김일성을 신화로 승격시킨다면 대내외적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북한체제를 더 굳건하게 결속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던 '주석'이라는 자리를 이어받지 않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유훈통치를 시작했다.  언필칭 생전의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정치를 수행한다는 의미였지만 신화를 정치적 이용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1997년 김정일은 인민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조선노동당 총 비서로 선출되었고 그 취임사에서 고난의 행군을 선포, 난국 극복을 하기위해 온 인민이 힘을합쳐 전력을 다하자고 호소했다.

 

 

 

 

 

김일성 신화를 바탕으로 국방위원장 중심의 체제를 확립하다.

 

 

 김정일은 1998년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주석직은 김일성 1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는데 권력변화가 일어날 때 발생할 수 있는 체제붕괴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김정일은 김일성 신화를 이용해 정치적 권력누수의 차단을 막았다. 헌법 개정 후,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중심의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혁명적 군인정신을 강조하는 선군정치를 선전했고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건설을 표방하면서 군부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군사, 정치, 사상, 경제면에서 강국이 돼야 한다는 의미에서 소위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표방하였다. 이는 군사, 정치, 사상면에서 이미 강국이 되었으나 경제가 문제이므로 경제 강국만 건설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내부결속과 개혁개방, 변화의 기로에서

실리중심의 노선을 취하다.

 

 1990년대의 국제상황은 북한에게 최대의 위협이었다. 공산주의의 부국이라고 불리우는 소련의 해체, 중국의 시장화, 연이은 동유럽권의 몰락을 지켜보며, 북한은 살아남기위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택한 노선은 실리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분열이 일고있는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밖으로는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는 이중전략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체제의 우수성을 계속해서 선전했다. 당시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지켜본 북한 지도부가 체제위기를 절감하며 내놓은 계책이었다. 북한 지도부는 "우리와 이들은(동유럽) 같은듯 하지만 다르다"며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는 비록 붕괴되었지만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식 사화주의 체제를 영원하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우리민족최고'라는 사상적 세뇌를 위해 단군릉을 복원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1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였으며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노력했다. 1994년에는 미국과 제네바 합의서를 1995년에는 일본과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개방, 개방, 그러나. . .

 

 당시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었으며 극심한 식량으로 수 백만 명이 아사했다. 여기서 북한은 자력갱생이라는 자립경제노선의 한계를 절감했다. 사회주의 경제가 비효율성이라는 깨달았던 것이다. 자력갱생이란 사실 외부 경제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부족한 에너지 원부자재 및 선진 과학기술 등을 발전시킬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잠재적 성장력을 상실시키는 것이라 애초부터 성공이 불가능한 경제노선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가 감소되고 미국이 경제봉쇄를 한 것도 북한의 경제난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북한은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4년 합영법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의 논리인정

1991년 나진 선진 자유무역지대 공포 - 두만간 개발계획

1992년 외국인 투자법 제정

1993년 1월 자유경제무역 지대법을 공포

1993년 10월 합작법 제정

1994년 1월 합영법 개정

1994년 10월 10일 북미관계 정상화 추진

- 1994년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반도 핵 문제의 전반적 해결을 위해 북한과 미국간 이루어진 합의서로 내용은 북한의 핵 개발 동결, 미국의 경수로 건설 제공, 북한의 한반도 비핵과 공동선언 이행, 남북 대화 재개, 북미관계 정상화에 관한 것이었다.  

 

1994년 금강산 관광시작

2001년 중국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 경제특구 성치

2002년 9월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 11월 개성공업 지구법, 금강산 관광지구법

 

 

 

 

1990년대 북한은 변화하는 세계체제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개혁, 개방이라는 실리노선을 취했다. 물론 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보완하는 차원으로 한정했기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거듭되는 북한의 말바꾸기는 미국의 경제적 봉쇄정책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북한이 고립노선을 탈피하고 개혁, 개방정책을 선언한지도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6자회담을 통해 개혁, 개방을 시도하는 북한 정권을 보며 북한 정권의 몰락, 북한의 민주화에 대한 장밋빛 예측들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2005년 9월 19일 제1단계 회담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IAEA로 복귀한다는 약속하는 이른바 9ㆍ19 공동선언에 합의하였으나 이 또한 이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2011년에는 우리의 땅(연평도)에 포격을 가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기도 하였다.  

 

 얼마전 김정일은 자신의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르는 3대 세습이다.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민주화 물결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봉건국가 북한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부디 이 5편의 졸작이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이상으로 5부에 걸친 북한의 정치, 경제노선에 대한 글을 마친다.

 

 

 

 

 

상생기자단 4기 최영훈

(justine127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