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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개성이 담고 있는 역사이야기

 

개성이 담고 있는 역사이야기

 

 

안녕하세요, 상생기자단 4기 지민구 기자입니다. 지난 달에 평양이 담고 있는 역사이야기(관련 기사 보기 ☞ http://blog.daum.net/mounification/8768761)  로 찾아뵈었던 것 기억 하시나요? 오늘은 북한 역사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을 맞이하여 개성지역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동비홀, 송악, 개경, 서경, 송도 제각각 다른 지명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북한 개성시의 옛 지명들입니다. 역사상 한 지역이 이렇게 많은 지명을 갖고 있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요?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곳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는데요.

  

지리적으로 경기 북부지역에 위치한 개성은 현재 북한에서 행정구역상 ‘개성특급시’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주요 거점도시를 ‘광역시’라고 부르는 것처럼 북한에서도 개성의 중요성 때문에 ‘특급시’라는 별도의 특별행정구역을 지정하였던 것이죠.

 

역사적으로 개성은 고려왕조의 수도로써, 그리고 경기지역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었는데요,최근에는 개성공단 덕분에 남북교류사업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다시 한번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고려 왕조의 500년의 찬란한 역사와 분단의 아픔을 동시에 갖고 있는 개성, 개성의 과거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곳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고려왕조의 수도가 되기까지

 

사실, 개성은 고려가 그 곳을 도읍으로 정하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곳입니다. 원래는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잠시 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기도 했었고,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시기에는 신라의 땅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에 따라 지명도 제각각으로 불렸는데요,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송악(松岳)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기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개성지역은 통일신라말기에 지방 호족의 성장과 더불어, 중국과의 활발한교역 덕분에 점차 국제 상업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후삼국 중에서 가장 강성한 국력을 자랑했던 궁예의 후고구려도 이곳을 임시 도읍으로 정하기도 했었는데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개성지역 출신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자 이곳을 고려왕조의 도읍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개성의 역사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2. 고려왕조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개경

 

고려왕조 약 500년의 역사, 그 중심에는 개성이 있었습니다.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었던 개성을 고려의 수도로 정하였는데요. 제 4대 왕 광종대에 이르러서는 송악, 개성으로 제 각각 불리던 지명을 개경(開京)으로 통일하여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왕조의 수도로서 정치·행정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했던 개경은,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외국과의 교역이 점차 증가하며 벽란도와 함께 국제 상업중심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번영도 잠시,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거란족의 요나라가 수 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2번째로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조정은 전라도 나주지역까지 피신을 가게 되고 텅 비어버린 개경은 요나라의 손에 함락되어 왕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이 모두 파괴되고 마는데요. 다행히 고려군은 양규의 분전으로 퇴로를 차단하여 반격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개경의 입지는 급속도로 좁아지게 됩니다.

 

 

1135년에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나며 수도의 자리마저 뺏길 처지에 놓이고 말지만, 결국 개경파 세력이 승리하며 다행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평양이 담고 있는 역사이야기" 블로그 기사에 담겨있답니다!)

 

하지만 개경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1231년,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족의 군대가 침입해왔기 때문이죠. 관군과 백성 심지어 노비들까지 함께 합세하여 몽고군에 저항했지만 세계 최강의 군대에는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최씨 정권은 바다 건너 강화도의 임시 수도를 정하고, 개경을 비롯한 전 국토는 몽고족의 손에 무방비 상태로 남겨지게 됩니다. 강화도에서 끝까지 저항을 계속 하던 고려 조정은 결국 60년 만에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됩니다.

 

 

고려왕조의 화려한 영광을 함께 했지만, 더불어 모진 수난도 겪어야만 했던 개경은 고려왕조의 마지막까지 그 아픔을 함께 하다가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수도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새로 건설된 신도시, 한양에게 그 자리를 뺏겨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개성이 행정·정치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을지라도, 여전히 주요 상업교역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는데요. 쓰러져가는 개성을 부활시킨 그 중심에는 바로 조선 최고의 교인집단, 개성상인이 있었습니다.

 

 

 

3. 개성인 최후의 생존 전략, 상업

 

 

조선 건국 초기에는 텅 비어있는 새 수도 한양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했기 때문에,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의 주민들을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이 같은 정책에 따르지 않았고 개성에 남은 주민들은 조선왕조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로 낙인이 찍혀 새로운 토지제도의 혜택(과전법)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즉, 장사를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었던 개성인들에게 ‘상업’은 최후의 생존전략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개성은 조선 중기 이후에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는데요. 개성을 기반으로 성장한 상인들은 그들의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조직화 하여 전국의 상업중심지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개성상인이라는 명칭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는 중국·일본과의 국제무역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구한말에 이르러 개성상인은 외국자본에 대항하는 강력한 민간자본으로 성장하였고, 독립·의병운동의 자금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외세 자본에 의해 그 활동이 제약 당하게 되면서 국제 상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였으며, 일제의 강제 합병조약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들의 근면·성실함과 고도의 상업 전략은 구 왕조의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었던 개성을 최고의 상업 도시로 성장시킬 수 있었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성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개성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역사의 조연에서, 역사의 주연으로 발돋움한 개성, 

그리고 위기 속에서 새로운 생존전략을 개척하여 성장할 수 있었던 개성.

 

이와 같은 개성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재 남북교류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개성공단이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남북이 통일되면, 

동북아 중심의 상공업 도시로 발전한 국제도시 개성의 모습을 꿈꾸는 것은

단지 저만의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